8년만에 수면 위로 떠오른 군가산점제는 최근 몇 달 간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자’였다. TV 토론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 언론 등 사람들 간 공론이 오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군가산점제에 관한 찬반 논란이 존재한다. 찬성 측에는 어김없이 남성들이, 반대측에는 여성들이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제각각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는 주장들이 끝 모르는 평행선을 이루고 있어 군가산점제에 관한 양성 간의 찬반 논의는 어떠한 합의점도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하지만 군가산점제란 공식에는 남성과 여성이란 두 대립항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남성이라도 군필자와 군 면제자 간의 이해관계가 다르며 군필자 모두가 군가산점제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군가산점제가 만드는 다양한 모순은 성대결 구도 속에 파묻히고 있다.‘D-WAR’를 능가하는 ‘GENDER-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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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게시판에 달린 댓글들. 군가산점제를 둘러싸고 양성 간에 오가는 비난성 댓글로 가득하다. |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군가산점제 논쟁은 양성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 ‘변호사 전원책 팬카페’의 게시판에는 군가산점제를 지지하는 글뿐만 아니라 여성부와 여성단체를 비판하는 성명,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글, 여성 누리꾼들의 글을 스크랩해 와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포털 사이트의 토론 게시판이나 군가산점제에 관한 뉴스기사의 댓글게시판은 이미 ‘의견 개진’이나 ‘토론’이라는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성매매특별법이나 페미니즘 운동 등 군가산점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안들까지 끌어다가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마초’ 혹은 ‘꼴페미’라 공격하고 있다.군가산점제 논쟁이 온라인을 벗어나 정계나 방송으로 무대를 옮겨오면, 인터넷에 난무하는 원색적 언어들은 자취를 감추지만 양성 간의 긴장감은 그대로 지속된다. 지난 7월 1일에 방영된 KBS 심야토론 ‘군가산점제 부활에 대해’ 편은 군가산점제를 놓고 벌어지는 남성과 여성 간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줬다. 토론에 참여한 한나라당 고조흥 의원은 “9급 공무원의 경우 합격자가 23세에서 25세 사이에 거의 분포하는데 이는 남성들이 군복무하는 동안 여성들이 합격한다는 이야기”라며 군필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진출이 늦어짐을 주장하는가 하면, 열린우리당 홍미영 의원은 “우리나라의 여성 정치 참여율은 세계 115개국 중 92위”라며 우리나라의 양성 평등 지수를 논하기도 했다. 찬반 양측이 “남성이 누릴 당연한 권리”와 “양성 평등에 어긋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논지만을 내세우는 동안 논의는 제자리에 머물렀다.‘여풍’ 뒤에 고개숙인 남성들은 ‘열렬히 환영’군가산점제를 둘러싼 논쟁이 성별 대결 구도로 흘러가게 된 데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면도 있다. 남성만이 징집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군필자-미필자’의 구도는 손쉽게 ‘남성-여성’의 구도로 전환된다. 남성 집단 내부에도 다양한 형태의 군 경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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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원 사회에서 여성들의 비중이 높아가는 이른바 ‘여풍’ 현상을 표현한 어느 일간지의 삽화. |
남성들에게 군 생활은 ‘조국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인 동시에 ‘아까운 청춘을 썩히고 오는 시간’이다. 이런 이중적 인식은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위 ‘여성 상위시대’ 혹은 ‘여풍’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이런 피해의식은 더욱 강화된다. 군 생활 경험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법고시 등 각종 국가고시에서 수위권을 차지하는 여자 수험생들, 학생회나 동아리 등 각종 모임에서 대표 자리를 꿰차는 여학생 등 소위 ‘알파걸’이라 불리는 여성들의 등장은 남성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현재 카투사로 군복무 중인 현 모 씨(남, 21세)는 “예전에는 남성들이 (학업이나 그 밖에 여러 활동에서) 여성들보다 잘 해왔으나 요즘은 여성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에 남성들이 군복무로 인해 여성에 비해 사회진출이 2년 정도 늦어진다는 사실은 취업을 앞둔 남성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취업과정에서 성차별을 겪는 여성들은 ‘결사반대’그러나 여성들의 피해의식 역시 못지않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선영 평등정책연구실장은 “자녀의 양육과 가사노동 등은 마땅히 여성의 의무라는 편견 때문에 기업은 여성 직원을 채용하면 출산휴가 등 각종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의 역할을 규정하는 사회적 성(gender) 때문에 여성이 취업시장에서 차별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각종 고시나 공무원 시험에 여성 응시자들이 모이는 이유는 “원칙적으로 성에 의한 차별이 덜하고 시험 점수로만 합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방 소재 전문대학에 다니는 김 모(여, 21) 씨는 “취직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다녀 봐도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는 단순한 업무를 맡기고 월급도 적게 주더라”고 불만을 터뜨렸다.남성과 여성 각각이 취업을 앞두고 갖게 되는 피해의식은 군가산점제를 찬성 또는 반대하는 심리적 근간을 이룬다. 가산점을 통해 2년간의 군복무로 인한 희생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은 남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제가 된다. 반면 남성들에게 가산점이 주어짐으로써 취업의 문이 좁아지게 되는 여성들은 화살을 남성에게로 돌린다. 이처럼 군가산점제는 남성과 여성 각각의 피해의식을 자극하며 양성 간의 대립 사이에 손쉽게 안착했다. 잊혀져 버린 장애인들의 목소리성대결로 번져 나간 논쟁 속에 군가산점제와 연관된 많은 당사자들의 문제들은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들 사이에서의 차별 문제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따르면 국가·지방자치단체와 50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공공기관은 신규 채용 시 모집 인원의 2%이상의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찬성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군가산점제가 시행돼도 장애인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군가산점제 논쟁에 있어 장애인을 ‘논외’로 두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장애인 중에서도 군복무 중에 혹은 군 제대 후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 임수철 팀장은 “공무원 시험에서는 등록 장애인이기만 하면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 뽑기 때문에 군 면제 받은 장애인과 군필 장애인이 똑같이 경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군필 장애인은 군 가산점을 받게 돼 그렇지 못한 장애인, 주로 선천적 중증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임 씨는 “노동시장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중증 장애인들 대부분이 군가산점제가 실시되면 또 한 번 차별을 겪게 되는데도 현재의 군가산점제 논쟁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에만 주목한다”며 중증 장애인들의 차별 문제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는 현 상황을 지적했다. 우리끼리 싸울 동안 정부는 뒷짐 지고 뭘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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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군인에 대한 보상이 다른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주어져서는 안 됨을 지적한 헌법재판소 |
군가산점제가 제공하는 군필자에 대한 보상은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있다. “제대군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회정책적 지원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다른 집단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할 균등한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는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이 지적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제대군인에 대한 처우 개선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군가산점제는 정부 차원에서 특별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시행 가능한 방법이며, 취업에 절박한 군필 남성들에게 공무원 채용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구실로 충분히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생색낼 수 있는’ 보상책이라는 비판이 여기서 나온다. 군가산점제가 공무원 시험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군필자들 모두가 아닌 극히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데 대해서는 찬성측에서도 꾸준히 문제제기가 있어왔다. 이렇게 모든 군필자들이 그 혜택을 보지 못하는 제도임에도 남성들은 이것 외에 다른 마땅한 대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았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군가산점제를 환영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정부가 제대군인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책을 마련하는 데에 안일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는 반증이다. 한국남성협의회 이경수 회장은 “그동안 남성들 사이에서 군복무에 상응하는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헌법소원 제기, 진정, 탄원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정부는 군복무 기간 단축 이외에 아무런 보상책도 내놓은 것이 없다”며 제대군인의 처우에 대한 문제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군필자들에 대한 보상책으로는 취업지원 시스템 마련에서 세제혜택, 보험혜택, 기업 입사 시 호봉 인정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보상이 정부가 정책적, 재정적으로 시행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군가산점제는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 채 군필자에 대한 보상을 군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감내하게 만들 뿐이다. 박선영 연구팀장은 “모든 군복무자에게 실질적이고 형평성 있는 혜택을 줄 수 있는 보상책이 필요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사회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보상 대책이 마련돼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20대 초반의 청춘을 국방을 위해 바친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군 제대 후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박 모(한양대 02)씨는 “제도적인 혜택도 중요하지만 남성들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군복무의 노고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이라며 “구체적인 방안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제대군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