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도착한 평택은 지난해의 격렬한 쌍용차 파업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하고 멀끔한 모습이었다. 평택역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쌍용오뚝이센터’만이 파업으로 피해입은 노동자들이 아직 남아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2009년 1월 9일, 쌍용차가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후 노동자 2646명의 인력감축을 강행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시작된 부분파업은 옥쇄파업으로 발전, 77일간의 치열한 목숨을 건 싸움으로 이어졌다. 극적으로 타결된 노사는 파업참가자 중 ‘52% 구조조정, 48% 구제’라는 대타협을 끝으로, 파업은 일단락되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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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특위 사무실 한 쪽 벽에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작은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그 아래의 일정표는 구속된 노조 간부들의 공판 날짜 등으로 빼곡하다. |
파업 노동자들의 삶에 여전히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그러나 현재 사측은 합의안의 대타협 정신을 져버리고, 국가의 공권력과 함께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2009년 10월, 경찰은 파업으로 인해 금전적 피해를 봤다며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에 대해 가압류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일부를 받아들였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이하 정특위) 위원장 이영호 씨는 “메리츠 화재에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240억원 규모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법원이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퇴직금과 부동산까지 모두 가압류 당한 노동자들이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는 “타협 당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사측의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은 것이라며 정특위 사무실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타협은 파기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 11월 18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파업에 동참했지만 살아남았던 비(非)해고노동자 126명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 중 34명은 징계해고를 당했다. 해고되지 않은 파업참가자가 300여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타협 당시 결정된 52:48의 비율을 변화시키는 큰 숫자다. 징계해고를 당한 노동자 A씨는 “부당해고를 당한 사람들은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지만, 징계해고를 당한 사람들은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다”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현 상태를 털어놨다. A씨는 파업이 끝난 이후 중증 우울증으로 인해 40여 일간의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우울증 입원 치료는 의료보험이 적용이 안 돼서 해고된 이후로 치료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완치가 되지 않았는데도 병원에 자주 가질 못하고 있어요”라는 그는 해고 통보를 받지 않았음에도 파업에 참가했던 사람이었다. 파업 직후에는 공황장애로 인해 가위에 눌리고 악몽에 시달리면서 불면증으로 시간마다 수면제를 처방받으면서 일주일만에 14kg이 빠졌다. “파업하는 동안 전기도 물도 가스도 없는 기본적인 생활이 안 되는 상황을 견디는게 고통스러웠어요. 경찰특공대가 퍼부은 무차별적 폭력이나 헬기 소리, 밤중에 일부러 틀어대는 노래 소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났어요.” 그는 지금도 2주일에 한 번쯤은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있다. 더 자주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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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해고자특별위원회 이영호 위원장은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한 처벌이 지속되는 현실에 대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부관참시”라고 말했다. |
정리해고자특별위원회, 기약이 없는 복직을 위한 투쟁
정리해고자특별위원회는 파업 당시 희망퇴직자가 아닌 사측에 의해 해고된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로, 아직까지도 매일 아침 회사 앞에서 복직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특위 사무실에서 만난 B씨는 “쌍용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서류심사에서 전부 탈락해요”라며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은 이 근처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고자 중에서는 원서를 100군데가 넘는 곳에 내봤지만, 전부 다 떨어진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하도 쌍용차 이력 때문에 서류에서도 자꾸 떨어지니까, 한 번은 쌍용차 이력을 빼고 이력서를 넣어서 면접을 볼 기회가 생긴거에요.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면접장에서 ‘왜 쌍용차 경력을 뺐냐’고 추궁하더래요.” 그는 면접관들에게 ‘먹고 살아야하는데 직장이 너무 안 구해져서 그랬다’고 털어놓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면접 기회도 주지 않고 그를 쫓아냈다. B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쌍용 경력이 걸림돌이 돼요. 그래서 대리운전이나 노가다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죠”라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스스로가 무급휴직자라고 밝힌 B씨는 친척을 따라 두 달 동안 아파트에 타일 붙이는 일을 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한 대부분의 노동자 분들들 역시 B씨와 마찬가지로 친척들의 도움을 얻어 임시적으로 직업을 얻고 있었다. 실제 사무실에서 만난 또 다른 노동자 C씨 역시 친척이 하는 축산업을 돕고 있다며 명함을 건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택배 배달을 하거나, 평택의 대추리 지역에서 땅을 다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재취업 업종으로 선택한 대리운전은 7시부터 새벽 4시 까지 일해도 하루 5만 원 이상을 벌면 많이 번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재취업이 어려운 이유를 정특위원장 이영호 씨는 “첫째로 쌍용 노동자들의 강성노조 이미지 때문이다. 파업노동자들을 고용하면 그들이 선동해서 자기 작업장에서도 파업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나이가 많은 노동자들은 현장 위계를 해치고, 임금 노동조건이 맞지 않아 고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부차적이고 첫 번째 이유로 고용주들이 담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어려운 상황은 무급휴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는 무급휴직자들은 복직의 가망이 거의 없다고 했다.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며 쌍용은 이번 달 현장직들에게도 급여의 50%만 지급했다. 이 위원장은 “합의 사항에 따르면 1년 동안 무급휴직자로 있다 복직되어야 하지만, 앞으로 노동자를 더 해고해야한다는 소리가 떠도는 것을 보면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재 쌍용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처우로 연결된다. 직원을 정리해고 한 이후로 살아남은 직원들도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철저한 현장 통제로 적막 속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 위원장은 “몸이 힘들어도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위로하거나, 밖에 사람이 많다는 은근한 협박이 무서워서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견뎌내고 있는 것”이라며 공장 안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피해에 대해서도 걱정했다.실형 선고받은 파업 간부들, 파업의 뿌리를 뽑는 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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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특위 사무실 한 켠에 붙어있는 구속된 조합원으로 부터 온 편지. |
설 연휴 하루 전인 지난 2월 12일, 수원지법 평택지원 재판부는 한상균 전 노조지부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노조간부 21명에게 최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파업을 주도하고 해고된 노조 간부들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며 정특위 이영호 위원장은 ‘부관참시’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미 해고된 노조 간부들에게 파업이 끝난 이후에도 법적인 책임을 물어 다른 노조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다. 다른 노조들이 파업을 시도하지 못하게 싹을 자르는, 아니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려는 행위다”라고 주장했다.구속당한 노조 간부들의 배우자들은 다른 해고자들의 배우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 정특위의 모든 사람들은 “파업에 참여한 사람보다 가족들이 더 고생이고 걱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구속당한 간부의 배우자인 C씨는 “전업주부였던 사람들이 갑자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고 회상하며 주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대부분이 식당의 설거지나 우유, 신문, 요구르트 배달 등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C씨는 “처음에 배달하러 갔을 때는 솔직히 부끄러웠어요. 그렇지만 쌍용차를 다니면서 큰 차를 구입하는 바람에 시의 보조금도 받지 못하고, 아이들은 어리고 양육비는 만만치 않다보니 방법이 없었어요”라며 “금속노조에서 나오는 신분보장금마저 받지 못하시는 분들은 평택 배 과수원에 가서 배를 따서 돈을 벌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해고자들의 배우자들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있다. 바로 1년이 넘게 지속되는 남편의 부재다. “누가 묻더라구요, 남편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돈이 없는거나, 배달하면서 부끄러운 건 시간 지나면서 아무렇지도 않아졌어요. 근데 갈수록 나한테 남편이 없다는 것,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다는 것이 제일 견디기 힘들어져요.” C씨의 어린 자녀들은 아직 아빠가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직 이 사태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돼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참는 C씨는 “그래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아이들이 없었으면 정말 삶을 포기했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옥상 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돼요 2009년 1월부터 하루하루가 악몽 같았어요. 이런 끔찍한 해가 나한테 있구나 생각할 때마다 괴로웠죠. 남편이랑 1년 3개월을 떨어져 생활하면서 2009년이라는 해를 아예 없던 일로 치부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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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강 노동활동가는 격렬한 파업이 잇따르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사회안전망의 부재’를 꼽았다. |
파업 이후 공장은 정상화, 파업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비정상?
파업 이후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대다수가 정신적·신체적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를 치료하기 위한 대책은 전무하다. 노동운동가 하종강 씨는 “해고 뒤에 사회안전망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한창 나이에 해고 위기에 몰린 노동자들은 격렬한 파업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사회안전망이 마련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쌍용차와 같은 파업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파업 이후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어 “파업이 격렬할수록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충격이 더 커진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모든 노동재해 노동자들에게는 정신적 치료가 병행되는 제도가 선진국에는 있다”고 지적하며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치료가 더욱 중요함을 강조했다. 노동자들이 파업 이후에 느끼는 자살충동과 우울함,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등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장기간의 파업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의사들의 개별적인 도움과 봉사의 영역에 맡겨두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쌍용차 파업 참가자들 역시 봉사활동을 오는 의사들의 치료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실제 쌍용차 파업 과정에서도 6명의 귀중한 목숨이 사라졌다. 서 씨는 “파업 피해자들의 정신적인 피해, 우울증, 자살을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의식의 전환을 강조했다.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이던 C씨는 “그래도 요즘에서야 작은 일에도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이 실형을 선고 받은 까닭에 함께 보내지 못한 설과 아빠에게 문제가 있음을 눈치 챈 것 같은 어린 자식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은 무겁지만, 그녀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은 아직 이 사회에서 ‘스스로의 다부진 마음가짐’외엔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