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의 열기가 사그라들던 작년 1월 즈음, 이명박 정부는 촛불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광우병 민대책회의와 민생민주국민회의는 2009년 1월 21일 정부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국제적 연대의사를 밝히며 참여한 이들 중에는 ‘미국의 양심’ 故 하워드 진이 있었다. 올해 1월 27일 향년 87세로 이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과 미국 진보진영의 앞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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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ward Zinn, 1922-2010 |
빈민가 노동자가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기까지
대공황 시기이던 1922년 미국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하워드 진. 그의 아버지는 웨이터였다. 바쁜 12월의 마지막 날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일하러 나가던 하워드 진이 처음 자각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정치인들과 미디어, 자본가들이 항상 하는 말, “미국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죽어라 일해도 평생 박봉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하워드 진은 유년기에 자본의 기만성에 눈을 떴다. 비슷한 시기 처음 나간 시위에서 경찰에게 맞아 기절한 이후에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워드 진은 18세에 선박설비 실습생으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실습생들의 조합에서는 언제나 조합, 파시즘, 전쟁, 사회주의 등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당시 전함을 건조하던 그는 대 파시즘 전쟁에 한몫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1943년에는 파시스트와 직접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에 공군에 지원한다. 그는 B17 폭격기의 앞머리에서 폭격조준기를 조종하는 폭격수가 됐다. 한편 유럽으로 출정하던 도중 백인 하사가 흑인 병사를 식당에서 내쫓으려는 장면을 보며 미국 내부의 차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그에게 가장 큰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준 이는 영국에서 만난 또 다른 B17 선미사격수였다. 그는 전쟁의 본질이 대 파시즘 전쟁이 아니라 각 제국들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전쟁에 참여했지?” 의아해하는 하워드 진에게 그 선미사격수는 답한다. “너 같은 사람과 대화하려고.” 하워드 진과 대화를 나눈 2주 후 그 선미사격수가 탄 폭격기는 격추당했고 대원들은 모두 사망했다. 자신의 정치적인 전쟁을 위해 군대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그를 생각하며 하워드 진의 사고는 점점 변해간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온 하워드 진의 머릿속에 전사한 선미사격수가 계속 떠올랐다. 또한 전쟁 중 느낀 인종갈등 및 파시즘의 실체에 대한 회의 등이 계속해서 그의 양심을 괴롭혔다. 결국 그는 귀국 후 군 생활을 정리한다. 이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56년 애틀랜타의 한 흑인 여자대학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과 학내에서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벌이던 하워드 진은 학생들의 배후로 지목돼 결국 1963년 6월에 파면됐다. 파면 후 그가 보스턴대로 학적을 옮긴 1964년 8월 베트남에서 통킹만 사건이 발발했고 10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지속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던 하워드 진은 1968년 미국 평화운동단체 대표 중 1인으로 북베트남 측과의 조종사 석방 교섭에 참여하러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수행한 전쟁 이후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 하워드 진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미국의 대외정책 및 내부의 차별에 항거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의 일생은 오롯이 반전평화와 민권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을 폭로하는 활동에 바쳐졌다.미국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비판과 자성 “하워드 진의 반전평화운동은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인권문제에서 시작된 반전 담론은 결국 그 전쟁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하워드 진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는 하워드 진의 주요 활동을 크게 두 가지로 술회한다.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투쟁을 통해 미국 내부의 모순들을 되짚었고,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한 반전운동을 통해 미국 대외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의 역사를 뿌리부터 다시 탐색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노예 제도를 이용한 경제성장을 적시하고 핍박받는 전 세계 민중들의 시각을 통해 미국을 바라봤습니다. 미국 내면의 고민과 대외정책의 모순들을 발견하게 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줬죠.” 하워드 진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미국 내부에서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전 세계에서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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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기적 금융자본의 실체가 등장하면서 하워드 진 등이 그 맥을 이어온 자본주의의 근본에 대한 의문들이 다시금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
김 교수는 이어서 하워드 진을 비롯한 미국 진보진영이 그간 이뤄온 성과와 의의를 이야기한다. “1860년대 남북전쟁 이후 법적으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의 지위는 근 100년 간 여전히 밑바닥이었지요. 이러한 모순들이 터져 나온 게 1960년대 인권운동 및 민권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베트남 전쟁이 터지면서 1968년의 활발한 논쟁들이 벌어집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해서 확신했던 세대들과 사회주의의 희망찬 미래를 추구하던 세대들이 격돌했던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소위 68세대를 낳은 이 시기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온갖 가치관들이 회자되던 시절이다. “좌우의 격돌과 사회주의 논쟁에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슈가 가세하면서 제국주의 전반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런 움직임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자본주의가 전쟁을 만들어내기에 반전평화를 외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의 근본을 교정하지 않고는 전쟁을 막아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어느 시대나 일반적으로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다음에는 소강상태 이후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된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는 레이건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뉴라이트의 반격이라고 하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보수 세력의 대대적 반격이 시작됐다. “브레튼우즈 시스템에 있어서 금 태환 정책을 포기할 정도로 달러의 위기가 오고 오일쇼크 등의 경제적 위기가 오면서 사실상 사회운동의 동력이 고갈됩니다. 유니온 버스팅 등의 노동자 압살과 소련의 패망,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1990년대까지 진보진영이 활동하기 굉장히 어려워졌지요. 미국 체제 내부의 모순은 계속 되고 대외정책도 제국주의적 선택이 지속됐습니다.” 이 당시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등의 지식인들이 거대한 운동의 흐름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치열하게 소수의 목소리를 냈다. “그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세계화의 환상이 전 세계에 심어지고 후쿠야마 같은 경우 역사는 끝났다고 말할 정도까지 보수의 반격이 완료됐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행선 상에서 제3세계 민중들의 피해가 계속되면서 하워드 진의 주장들을 다시 경청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한국의 경우 1970~80년대 맑스 중심의 정치경제학 논의와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게 1990년대 들어와서는 거의 없어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등이 그 자리를 대체하죠. 반면 미국에서는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기고 꾸준히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 이어져 온 비판들이 좌파 정치경제학 등의 맥락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 및 대외전략에 대해 비판의식을 놓치지 않고 유지해 온 하워드 진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시화되는 위기의 시대에 다시금 빛을 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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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극도로 진행된 1999년 전세계 민중들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WTO 회의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다. 5일간의 반WTO 시위를 다룬 영화 <더 배틀 인 시애틀>의 한 장면. |
하워드 진 이후, 미국의 진보는 존재하는가
익히 알려진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석학들은 고령인 경우가 많다. 故 하워드 진 교수는 1922년 생이며 노암 촘스키 교수가 1928년 생, 세계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가 1930년 생이다. 모두 올해 80세 이상의 고령이다. 이후 흐름이 끊긴 것일까. 젊은 진보적 석학들의 소식은 바다 건너 한국까지 들려오지 않는 것 같다. 서울대학교에서 김수행 교수 퇴임 이후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는 경제학부 교수의 맥이 끊겼듯이 미국에서도 68세대 이후 진보적 학문의 흐름은 끊긴 것인지 의문도 든다. 자본에 의해 잠식당한 대학가의 모습에 있어서 한국과 미국의 현실은 비슷하지 않을까. 혹시 진보적 학자에게 정년보장마저 꺼리는 한국 대학들처럼 미국의 대학들도 비슷한 상황에 있지 않을까. 김 교수는 그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고 답한다.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온 하워드 진 등의 목소리는 물론 그 당시에는 다수가 경청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점차 그 주장대로 현실이 나타나니까 그 고민들을 도처에서 인식하게 됐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의식들을 제기하는 바탕이 됐지요. 한국의 경우 1970년대에 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썼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중견세대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에서도 비단 운동의 양식만이 아니더라도 그 흐름은 끊기지 않았고 다시 살아나는 중입니다.” 실제로 의 작가 앨리스 워커, 의 회장을 지냈던 매리언 라이트 이델만 등은 하워드 진에게 스펠만 대학에서 지도받은 제자들이다. 김 교수는 그 외에도 탈식민담론을 내세우는 가야트리 스피박, 세계적 반열에 오른 학자 호미 바바 등이 모두 끊기지 않고 이어진 미국 진보운동의 맥을 계승했다고 여긴다. 다만 많은 진보적 학자들이 소위 주류대학보다는 지방의 학교에서 입지를 다지며 저술 및 사회적 발언 등을 통해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미국의 진보운동 희망은 있는가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온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미래가 그다지 비관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특히 지금처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에서 기인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때라면 말이다. 실제로 자본에 대한 무한 방임을 주장하던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의 통제는 필요하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비록 급진적인 학자들 및 진보운동가들이 보기에 그 정도가 미흡할지라도 그 추세는 세계적으로도 점점 커지는 실정이다. 다보스 포럼에서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자본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제도 개혁이라는, 거대 의약자본과 개혁세력의 맞대결에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가 오바마의 우군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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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워드 진은 사후에도 여러 저서와 남겨진 사상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그러나 하워드 진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조차 무조건적으로 낙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에서 쓴 말처럼 “지배체제가 그들이 다양성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과시할 목적으로 주류의 한 귀퉁이에 간신히 붙어있도록 허용하는”정도의 진보만이 대외적으로 보장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9.11사태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를 촉구해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은 진보세력이 결정적인 순간 침략전쟁을 막아낼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 흐름들이 실제로 기성 권력에 도전할 정도의 힘을 갖추기 직전이 된다면, 마치 전래동화 중 아기장수 모티브와 같이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희망은 좌절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진은 생전에 항상 “희망은 변화를 위한 에너지다”라는 말로 희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올바른 세상을 만든다는 목표 못지않게 그 과정 또한 중요시했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미국과 세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부조리와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누가 미국의 진보는 어둡다고 감히 비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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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최악의 상황과 싸우면서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놀라운 승리이다.”-하워드 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