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보호법 아래 공개되는 통신비밀
‘PD수첩’, YTN노조의 이메일 압수수색을 통해 허술한 통신비밀 관리 상태가 드러났다. 수 개월 치 혹은 수 년치의 광범위한 분량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함으로써 수사와는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됐다. 그 뿐아니라 PD수첩의 PD,작가들의 이메일은 부분 부분 짜깁기 돼서 언론에 발표됐다. 검찰 측에서는 공개한 이메일 내용이 수사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지만,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오병일 씨는 “수사와는 상관 없는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류제성 변호사는 검찰의 PD수첩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적법한 절차로 영장을 발부 받았더라도 무차별적인 압수수색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검찰이 이메일을 공개한 것은 개인의 인격권, 사생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명백한 위법행위”라고 밝혔다. 이메일 내용이 짜깁기 되어 검찰에 의해 발표됐을 때의 심정을 묻는 질문에 이춘근PD (전 ‘PD수첩’ PD)는 “개인의 사생활, 사상이 담겨있는 이메일 내용이 공개 됐다는 것이 황당했고, 그 이메일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부분부분 발췌 했다는 것이 더 황당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의 사생활 침해를 통해 얻어진 정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나의 사생활을 공개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이메일은 통신이 아니다?!언론노조 총파업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2009년 3월 3일,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과 민동석 전 농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은 PD수첩 ‘광우병’편 제작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3월 5일에는 이춘근PD에게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 됐다. 이춘근PD에 의하면 바로 그 다음 날인 3월 6일에 검찰은 포털에서 이춘근PD의 이메일 계정에 있는 이메일을 압수해 갔다. 그러나 이춘근PD는 검찰측의 통보가 아니라 다음날 신문에 난 검찰 브리핑을 통해서 자신의 이메일이 압수수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춘근PD가 이메일 압수수색 사실을 직접 통보받지 못하고 언론을 거쳐 알게된 것은 현행법상 이메일이 ‘물건’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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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근PD는 “검찰의 이메일 압수수색을 피해 8년간 쓰던 계정을 두고 사이버망명을 떠났다”고 말했다 |
오병일 씨는 “통신에는 앞으로 보낼 이메일등의 ‘미래의 통신’만 포함되는데 송수신이 완료된 이메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는 ‘과거의 통신’이므로 통신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건에 속해서 통신비밀보호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이메일이 물건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메일에 대한 자료의 요청은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한 통신제한조치(감청)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사소송법에 의한 물건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이루어 진다. 이춘근PD는 “이메일은 주로 사담이나, 일기, 기고할 글들을 중간중간 올려 놓는데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메일은 사상이나 양심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물건으로 취급하냐”며 현재 통신비밀보호법의 문제를 지적했다.당사자에게 통보되지 않는 이메일 압수수색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하면 감청은 반드시 당사자에게 사후 통보를 해야하나, 압수수색은 통보의 의무가 없다.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는 “현재의 통신비밀보호법은 감청이나 통신사실확인자료 취득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 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기본권을 침해당한 본인은 정작 그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류제성 변호사는 한발 더 나아가 “송수신이 완료된 이메일은 법적 사각지대에 있다. 이를 검찰이 악용한 것이며 법원 역시 이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한 것” 이라며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또한 이메일에 대한 압수수색은 압수당하는 당사자가 이메일 계정의 주인이 아니라 포털 사이트다. 따라서 일반적인 압수수색과 달리 압수물품 명단을 적을 필요도 없고, 본인이나 관련자 없이도 수색이 진행될 수 있다. 이춘근PD는 “체포에서 풀려난 후에도 여전히 검찰이 나의 어떤 이메일을 취득했는지 확인 할 수 없었다”며 “어느 기간 동안에 몇 건의 이메일을 압수했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통신비밀보호법의 다른 문제들, 산 넘어 산이메일이 물건으로 분류되는 것은 영장발부 조건의 완화라는 또다른 문제점을 낳았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감청은 ‘범죄를 계획 또는 실행하고 있거나 실행했다고 의심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범죄의 실행을 저지하거나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의 수집이 어려운 경우에 한하여 허가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압수수색 영장은 ‘법원이 필요할 때’에 발부된다. 법 조항으로 봐도 이메일에 대한 영장발부조건은 통신에 비해 엄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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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누군가 ‘합법적으로’ 당신의 이메일을 보고 있다면? |
한편 통신 기록에는 통신내용과 통신내역이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 보호 받는 통신 내용은 통신 중에 오고간 내용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통신했는지와 같은 정보와 접속사이트, IP주소가 담긴 통신내역(통신사실확인자료)의 관리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기통신사업법에 의해서 관리된다. 류제성 변호사는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르면 영장 없이도 수사기관의 임의로 통신내역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신내역을 통신비밀보호법의 영역으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영장 없이 감청을 허용하는 긴급통신제한조치 또한 현재의 통신비밀보호법이 갖고 있는 독소조항이다. 오병일 씨는 “긴급통신제한조치는 영장 없이 감청한 후 사후 36시간 이내에 영장 신청이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36시간 동안에는 수사기관 마음대로 감청할 수 있는 것”이라며 긴급통신제한조치를 비판했다. 류 변호사는 긴급통신제한조치에 대해서 “통신제한조치는 범죄 혐의를 확보했을 때 허가가 된다. 그런데 혐의를 확보했다는 것은 이미 수사가 많이 진행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수사를 또 긴급하게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라며 긴급통신제한조치를 폐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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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통신비밀보호법 |
통보확실하고, 영장 발부기준 까다로운 미국의 통신비밀보호
한국의 통신비밀보호법이 사생활 침해에 무감각한 반면 미국의 통신비밀법인 ECPA는 사생활 침해에 민감한 편이다. 박경신교수는 “우리나라 통신비밀보호법에는 통신내역(통신사실확인자료)에 대한 영장발부조건이 전혀 없는 반면에 미국은 ‘최소한 범죄수사 관련성’을 영장발부 조건으로 제시 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감청사실을 검사에 의해 모든 수사가 다 끝난 다음에 통보하지만, ECPA의 경우 기소 불기소 결정에 관계없이 감청이 이루어 지면 무조건 통보하고, 감청신청이 기각되더라도 대상자에게 감청사실에 대한 통보가 이루어진다.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개정안이러한 문제 때문에 통신보호법에 대한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상정돼 있다. 한나라당 이학재,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이메일을 통신에 포함시키는 법안”을 상정했고 한나라당 이한성 의원은 “감청설비를 의무화하자”고 주장했다. 박경신 교수는 “이학재,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통신비밀보호법 자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형사소송법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이메일 압수수색을 규율하기 위한 법”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류제성 변호사는 여전히 이학재 의원이 발의한 안에 “이메일뿐 아니라 문자 메시지, 음성사서함, 인터넷 비공개 게시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한성 의원의 개정안의 내용은 ▲휴대폰을 감청 대상에 포함 ▲GPS정보를 통신사실확인자료에 포함 ▲통신사업자의 협조의무를 의무화 ▲1년간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의무화 등이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류 변호사는 “현행법 상의 법해석을 통해 휴대폰감청이 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한성 의원 안대로 법이 개정되면 휴대폰 감청이 법문에 명시되므로 더욱 활발히 감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이한성 의원으 안은 전국가적인 감시체계를 갖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병일 씨는 “오로지 범죄수사를 목적으로 모든 인터넷 통신기록을 저장한다면 이는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이라며 법개정의 방향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인터넷 사업자에게 감청설비를 의무화 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 감청 설비 없으면 통신 사업 못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수사기관이 해야 할 일을 통신사업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며 개정안을 질타했다. 이밖에도 오 씨는 “통신사업자들은 언제나 프로그램을 감청가능한 방식으로 설계해야 하므로 다양한 서비스 개발에 제한이 걸린다”며 IT산업의 침체를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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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성의원 개정안에 따르면 휴대전화 감청도 가능해질 예정이다. |
수사의 효율성과 프라이버시 보호 사이에 균형필요
진보네트워크, 문화연대 등의 시민단체는 통신 비밀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이한성 의원안을 막기 위해서 ‘미디어 행동’을 조직해서 반대 운동을 했다. 또 비판적 의견서를 제출하고 토론회나 캠페인을 활발하게 벌였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도 이런 안이 상정됐었다가 비판여론 때문에 반영이 되지 않았다. 이춘근PD는 “법적근거가 갖춰진다면, 법적근거가 없던 상황하고는 그 양태가 달라지게 된다. 감청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원인이 될 것” 이라며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양산될 것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수사를 위한 감청의 필요성과 통신의 비밀을 보호할 필요성은 언제나 공존한다. 류제성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관행상 수사의 효율성과 편의를 위해 통신 비밀의 보호에 대한 필요를 억제해왔다”며 “이제는 수사의 효율성과 사생활 보호 사이에 균형있게 감청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법이 개정돼야 할 시점” 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