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새마을로 거듭날 왕십리를 등지는 사람들

공동입주하는 그 날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플랜 카드가 텅 빈 동네에 걸려있다.조선시대, 왕십리의 주변 지역에는 농기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대장장이들이 모여 살았다.4대문과 가깝지만 내부에 속하지 않는 왕십리의 위치적 특성 때문이었다.시간이 흘러 왕십리는 한 때, 서울 중심부 근처에서 철공소가 집중해 발달한 ‘쇠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금속 공업의 메카로 불렸다.
###IMG_0###
공동입주하는 그 날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플랜 카드가 텅 빈 동네에 걸려있다.

조선시대, 왕십리의 주변 지역에는 농기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는 대장장이들이 모여 살았다. 4대문과 가깝지만 내부에 속하지 않는 왕십리의 위치적 특성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왕십리는 한 때, 서울 중심부 근처에서 철공소가 집중해 발달한 ‘쇠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금속 공업의 메카로 불렸다. 그러나 금속사업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왕십리 뉴타운 사업이 발표된 이후로 철공소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뉴타운 시범지구 지정 이후의 상왕십리동왕십리 뉴타운 3지구에 찾아가기 위해 상왕십리역에서 빠져나오자 대로변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낡은 철공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마다 오래된 간판 위에 재개발 반대를 위해 손으로 직접 쓴 듯한 조잡한 플래카드들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한 눈에도 도시 정비가 필요해 보이는 낙후된 상왕십리동은 2002년 당선된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도로 용산, 길음과 함께 강북의 균형 발전을 위한 뉴타운 1차 시범지구로 지정됐다. 시공사로는 대우건설과 용산 4구역의 시공사이기도 한 삼성건설이 참여해 대규모 재개발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경이 개선될 새로운 왕십리는 몇 십년 간 어렵게 살아오던 원주민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십리 3지구 주변에 한 건물에도 두 세 개씩 자리 잡은 부동산은 왕십리 뉴타운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짐작하게 했다. 용산과 마찬가지로, 적은 보상금으로 수십 년간 지내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에 원주민들은 분노를 느낀 모양이었다. 플래카드는 고향같은 왕십리에서 떠나기를 종용하는 재개발 사업에 대해 저마다 다른 내용으로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영업 중인 철공소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간판과 플랜카드만 남겨둔 채로 굳게 문을 닫았다. 근처 부동산 중개업자는 “원주민은 80% 이상 떠났다. 남아있는 가게들도 올해 말까지는 정리할 것이고, 내년 초에는 착공이 전부 시작될 것”라며 동네가 한산한 이유를 설명했다. 중심지구의 주변에 모여서 발달하는 금속공업은 10개 이상의 업체가 협력해야 하는 사업의 특성상, 80%의 주민이 떠난 지금 남은 철공소도 앞으로의 운영은 힘들 터였다. 그래서 철공소 주인들 다수는 체념한 표정으로 “우리도 떠날 것”이라며 무심히 인터뷰를 거절했다. 30년 생활 터전을 두고 떠나는 한 원주민의 이야기

###IMG_1###
왕십리의 진짜 주인들은 새로운 왕십리를 떠나야 한다.

도로변에 위치한 ‘삼영볼트’의 주인은 상왕십리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묻자 “얼마 안 살았다”고 퉁명스레 대꾸하더니 “한 30년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냥 30대에 벌어먹고 살려고 떠돌다가, 어쩌다보니까 여기에 와서 철공소 일을 하게 됐다”며 ‘어쩌다보니’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왕십리는 자신이 처음 터 잡은 젊은 시절부터 철공소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어쩌다보니 정착한 왕십리에서, 어쩌다보니 철공 일을 하게 된 그는, 어쩌다보니 쫓겨나는 일만은 막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힘으론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이주를 강요하고 있다.상왕십리동의 철공소 주인들은 보상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보상금을 많이 받았냐는 질문에 듣고 있던 옆 가게의 주인은 “많이 받았으면 벌써 나갔지”라며 “많이 받는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받았다”고 얼버무리다가 기자의 ‘감정평가’라는 말에 크게 반응했다. “감정평가라는 것이 아주 조심히 해야 되는 건데 감정평가 결과가 정확한 기준이 없더라고. 많이 받아야 할 가게는 적게 받고 적게 받을 것 같은 가게는 많이 받고… 그러니까 주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거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실 여기야 말로 용산처럼 들고 일어났어야 됐지. 여기 사람들은 천 만원 정도 받고 나갔다”고 말했다. 그들은 현재 보상금액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스스로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책위를 만들어서 용산처럼 거센 투쟁을 할 생각은 없단다. 그 이유는 “용산 참사가 나는 걸 보고 우리도 투쟁해봤자 별로 재미를 못 볼 것 같아서 사람들이 포기하고 하나 둘 떠났기 때문”이었다. 용역이 온 적이 있는지 궁금해 하자 거주지역인 1, 2구역에는 용역들도 왔지만 철공소가 모인 3구역에는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끝까지 협상을 거부할지를 묻자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들이 계속 가게를 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그냥 할 일도 없고 시간이나 때우고 앉아 있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가게를 그만 두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자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다. 나이 60넘어서…”라며 대답을 마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먼저 가게를 닫고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 각자 뿔뿔이 떠나서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이제 서울 어디에서 철공소 하겠느냐”고 자조할 뿐이었다. 낡은 벽에 아직 남아있는 세입자 대책위원회와 조합에 대한 고발 벽보나 ‘주거권은 인권이다’와 같은 페인팅은 얼마 전만 해도 이 지역에서 세입자들과 철거민들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현재 상왕십리동에 남아있는 주민들의 상태는 한 마디로 ‘체념’이었다. 민담에 따르면 왕십리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본래 왕십리의 위치에 도성을 세우려 했으나, 무학대사가 십 리를 더 가서 도성을 세우라고 충고한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탓에 왕십리는 조선의 도성이 소재한 곳이 아니라 도성에서 10리가 떨어진 곳이 됐고, 상왕십리동은 대장간이 모여 있던 곳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대장간도 철공소로 바뀌었지만,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2010년 뉴타운 사업을 통해서 ‘새마을’로 다시 태어나는 상왕십리동은 상왕십리역과 신당역을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서울 동북부의 새로운 부도심으로 개발된다. 자신들이 왕십리의 진짜 주인이라고 주장하던 그들은 이제 도성에서 10리보다도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떠밀리고 있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용산참사 7개월, 이대로 잊혀져도 좋습니까?

Next Post

판자촌, 삶의 터전을 부정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