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신종플루로 들썩이고 있다. 연일 매스컴은 신종플루에 관한 다양한 보도들을 쏟아내고, 정부에선 홍보자료 배포, 거점병원지정, 타미플루구입 등 대응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대응책의 사각지대에 있다. 기본 정보조차 전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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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있는 홍보자료, 외국인들을 위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
보건복지콜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신종플루와 관련해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은 마련된 것이 없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홍보책자들을 주요 외국어들로 번역하여 배포하라는 권고가 전부다. 그러나 9월 26일 현재까지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서울시에서 발간한 신종플루 예방 홍보 책자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구할 수 있는 것은 민간단체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한 홍보책자 뿐이었다. 2009년 5월 1일에 보건산업진흥원은 산하기구로 외국인 의료 상담을 지원해주는 메디컬콜센터(1577-7129)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국어에 능숙치 못한 외국인들,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메디컬콜센터에 관한 홍보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2005년 국제보건의료발전재단에서 발간한 ‘외국인노동자 보건의료실태 조사연구’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출신국은 중국(한국계 중국인 포함),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몽골 순이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상담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메디컬콜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주노동자는 일부 중국 이주노동자뿐이다. 문제는 취약한 메디컬콜센터에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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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성 대표는 언어의 장벽이 이주노동자들에게 가장 넘기힘든 장벽이라고 말했다. |
질병관리본부는 신종플루 관련 내용을 첫 화면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홈페이지 어디에도 영문버전 홈페이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Q&A란에 영어버전이 있기는 하나, 제공되는 정보가 양적 질적 측면에서 모두 부족한 실정이다. 의사소통 문제, 차별의 첫 시작 이주노동자들이 정보를 제공받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는 이번 신종플루 사태가 처음이 아니다. 그들이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건강보험 가입약관, 가입절차 등을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진료 중 의사와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사단법인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씨는 이주노동자들이 의료기관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 첫째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꼽으며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의사에게 설명하기 힘들다. 설령 의사가 진찰을 해 결과를 통보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사측에 조퇴를 요청할 때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했다. 김 씨는 “어느 병원에서 어떤 진료가 이뤄지는지 내용조차 모르는 이주노동자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 이애란 사무국장은 입국 과정에서부터 언어 차별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입국 후 이뤄지는 건강검진과정에서 보험종류와 혜택들을 설명해 주는데, 한국어로 설명이 진행되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정보들이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의사소통 과정에서 배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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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란 사무국장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보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전달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제도권 밖으로 밖으로
언어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요소는 도처에 널려있다. 김해성 씨는 자신이 이주노동자 전문의원을 설립하게 된 계기로 한 중국동포의 사례를 소개했다. “불법체류신분의 한 중국 이주노동자가 작업을 하다가 못에 발을 찔렸다. 그 노동자는 작업 도중 조퇴를 할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의료비를 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다. 그는 참고, 참고 일하다가 결국은 온 몸이 퉁퉁 부어 죽었다. 사인은 어이없게도 ‘파상풍’에 불과했다.” 김 씨는 이 어이 없는 죽음을 ‘홍수에 떠내려가는 도중에 목이 말라 갈증으로 죽은 경우’에 비유하며 “의사, 간호사의 수는 충분한데 비해 그 많은 인프라를 1%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밝혔다.현재 한국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의료 혜택을 위해 지정된 법은 없다. 보건복지부 황상철 사무관은 “건강보험, 의료급여 등 우리나라 의료 보장 제도를 통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이주노동자는, 입원 진료와 당일 외래수술에 대한 진료비를 500만원 범위 내에서 지원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지원 제도 속에는 많은 허점들이 있다. 이애란 사무국장은 “의료비 보장 제도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은 주로 의료원, 적십자 병원, 2년 이상 무료 진료 실적이 있는 곳으로 그 수가 매우 적다”며 제도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김해성 씨는 “정부의 의료비 지원을 받기에는 거쳐야 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고 말한다.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들어온지 3개월 이상이고, 현재 신분이 불법체류 상태이며,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입증되야 하고, 수술, 입원에 한해서만 지원되는 등 까다로운 자격 요건이 요구된다. 김 씨는 “기본 진료를 담당하는 1차 의료기관에서 수술, 입원을 담당하는 2차, 3차 의료기관으로 연계되는 한국의 의료 체계 속에서 1차 의료기관을 아예 배제한 채 2차, 3차 의료기관에만 지원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현재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고용주가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사실이 드러날까봐 입증을 꺼리는 경우도 종종 있어 이주노동자들이 의료비 지원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고가 발생하면 근로복지공단에 신고해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산재보험은 국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으며 이주노동자에 대한 보상 또한 한국인과 동일하다. 그리고 치료가 끝날 때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신분을 합법적인 체류자의 신분으로 전환해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산재보험은 매우 이주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의 적용은 치료 후 추방을 전제로 한다. 이애란 사무국장은 “추방의 위험성 때문에 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산재보험 처리 받기를 꺼린다. 실제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오래 머물며 돈을 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는다. 그대신 고용주와 음성적으로 타협해 유야무야 처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산재보험의 약점을 꼬집었다.등록 이주노동자 임의 가입의 함정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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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보험이 임의가입으로 바뀐 이후 합법체류자의 가입률이 현저히 낮아졌다. |
보건복지가족부 황상철 주무관은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등록된 이주노동자에 한해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그러나 내국민과 같이 강제가입이 아니라 임의가입”이라고 말했다. 김해성 씨는 “임의가입이 등록 이주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가장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올해 2월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실제 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건강보험 가입률은 35%밖에 안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김 씨는 “정책상의 문제다. 선택권을 줬으니까 안 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경우 사업주와 노동자가 보험료를 반반씩 부담해야하기 때문에 쌍방이 모두 안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의 가입의 경우 본국의 의료보험으로 혹은 민간 보험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저개발 국가에서 왔으므로 본국에서의 의료보장이 잘 돼있지 않고, 국내 민간 보험에 가입할 여력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공공의료 시스템 안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편 직장을 그만둔 상태로 2개월이 지나면 이주노동자의 직장보험은 저절로 소멸된다. 이 또한 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마땅이 누려야할 공공의료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다. 김해성 씨는 “국민의 기본권, 특히 건강권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임의가입이 아니라 의무가입으로 전환 시키는 것이 옳다고 본다”며 의무가입의 실시를 주장했다.아플 여유조차 없는 그들, 지원조차 없는 정부 이주노동자들이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은 크게 시간적 요인과 경제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국제보건의료재단 이건상 대리는 “이주노동자들은 6시 이후에 있는 잔업을 선호한다. 잔업을 하면 수당의 1.5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업이 많은 평일 저녁과 토요일에는 이주노동자들이 거의 의료기관을 이용하지 못한다”며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개인병원과 종합병원을 이용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무료진료소는 대체적으로 토요일 혹은 일요일에 열리지만, 이 또한 문제는 있다. 환자에 비해 진료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긴 진료 대기시간을 무료진료소의 문제점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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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사설 의료보험 조합인 의료 공제회에서는 건강보험과 동일한 혜택을 제공한다. 한달에 5,6천원씩 매달 납부하면서 의료공제회와 협약을 맺은 병원 내에서는 의료보험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설 건강보험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애란 사무국장은 “의료공제회 상담소를 경유해 가입하고 회원활동도 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단속의 대상이다 보니 단체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운영의 고충을 토로했다. 정부의 지원 없이 순수 후원금으로 단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 공제회는 만성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친다. 이주노동자의 의료혜택을 가로막는 균열들을 메우기 위해 민간 차원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인력난, 열악한 장비 때문에 이주노동자 의료 혜택의 완벽한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저출산 · 고령화의 가속으로 이주노동자의 지속적 유입이 점쳐지는 지금, 한국은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 씨는 “이주노동자의 건강권 인정은 다문화 사회로 가는 길의 첫 단추를 꿰는 단계와 같다. 장기적 안목에서 이주노동자들을 표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이애란 사무국장은 ‘등록 이주노동자는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으면 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정부에서 하는 무료진료소를 이용하면 된다’는 식의 정부의 안이한 태도를 강하게 질타하면서 “사고가 터진 이후에 관리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의 낭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국장은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은 자명한 일인만큼 정부는 이들을 제도권 안에 흡수시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단기적으로 보여주기 식의 무료진료에 급급해 하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개정해 나가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