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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5월의 어느 날, 부산에서 사진작가 최민식 씨를 만났다. |
“사진을 찍는 건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며 렌즈에 세상을 담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이 있다. 사진작가 최민식 씨다. 카메라를 든 그는 배고프고 상처 입은 민중의 얼굴을 기록했다. 그의 사진은 진실을 말한다. 그의 사진은 낮은 데로 향한다. 최민식 씨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 소외받은 사람을 포장 없이 드러낸다. 82세의 나이에도 ‘쌩쌩한 현직’이라는 그는 말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화가 지망생, 사진 작가가 되다 지금은 큰 사진작가인 최민식 씨도 처음부터 사진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다. 그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1955년, 그는 그림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나와 같이 16명이 밀항했는데, 그 중 두 명 빼고는 검문에 걸려 한국으로 강제송환 됐어요.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검문에 걸릴까봐 조마조마하던 게 아직도 생각나네요”라고 말하며 살짝 웃어보였다. 최민식 씨는 도쿄중앙미술학원의 야간부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식당에 취직했고, 목포에서 식당을 경영했던 식당 주인은 한국인인 그를 친밀하게 대했다. 그가 처음 사진을 접한 건 그 무렵이었다. “헌 책방에서 우연히 스타이켄의 ‘인간가족’이라는 사진집을 봤습니다. 그만한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때부터 일본인 친구들과 중고 카메라를 한 대 사서 쉬는 날이면 사진을 찍기 시작했죠.” ‘인간가족’은 국경을 넘어, 인류를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사진집이다. 그를 힘들게 한 가난과 군부독재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1957년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사진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사진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집을 팔고, 팔고, 또 팔았어요. 주머니 사정은 점점 나빠졌죠”라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쳤다. 독일인인 임 세바스틴 신부가 조력자를 자처했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죠. 13년간 제가 사진집을 내는 걸 도와줬어요. 덕분에 책을 5권이나 만들 수 있었죠.” 그는 아직도 임 신부를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고. “그분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진을 못했을 거예요. 당시 매달 30만원을 받았습니다. 10만원을 생활비로 쓰고 20만원으로 사진을 찍었죠. 당시 시청 직원 월급이 3만 8천원 정도였으니 큰 돈이었죠. 13년간 정말 열심히 열심히 찍어댔습니다.” 임 신부가 떠나면서 그의 경제 사정은 악화됐다. 출판소가 한국인 신부에게 인계됐는데, 새로운 신부는 사진에 관심이 없었던 것. “그 이후로는 어려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상금을 받고, 강의를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생활해 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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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세상의 빈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
그를 힘들게 한 건 경제적인 어려움뿐만이 아니었다. 군부독재시절 정권은 최 씨의 사진을 눈엣 가시로 바라봤다. “사진을 찍고 출품하니까 사진이 외국에 나가잖아요. 새마을운동이다 뭐다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내 사진이 시대를 역행한다고 생각했겠죠. 그 때는 여권발급이 안 되고 그랬어요”라며 최민식 씨는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한다. 그는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백 번 넘게 간첩으로 신고 당했습니다. 아마 그런 걸로 상을 준다면 제가 1등일 걸요”라며 웃음지어 보였다. 최 씨는 인생에 있어 가장 아찔한 순간으로 1967년을 꼽는다. 1967년, 그의 첫 번째 사진집이 발간됐다. 사진집이 발간되고 열흘 쯤 뒤에 울릉도에서 ‘진짜’ 간첩이 체포됐는데 그가 수류탄과 함께 최민식 씨의 사진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죠. 언론에 보도도 많이 됐고. 다행히 잘 해결됐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사진이 드물던 시기였다. 사진작가는 더욱 드물던 시기였다. 그는 사진작가를 간첩으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우리 현실의 아픔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리얼리즘, 그가 인간을 풀어내는 방식 그의 사진은 오로지 ‘인간’만을 주제로 한다. “인간도 여러 부류가 있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어린이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외국인도 있어요. 저는 그런 인간 가운데 서민, 가난한 사람, 소외받은 사람을 주로 찍습니다.” 처음에 그가 사진집을 낼 때 사진집의 제목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 당시 발간을 맡은 동아일보사는 책 제목을 ‘인생의 어떤 순간’으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최민식 씨는 책 제목은 ‘인간’이어야만 한다고 고집했다. “다른 것보다 나는 한권의 책만 내고 사진을 그만 찍을 마음이 없었어요. 죽을 때까지 사진을 찍고 싶었고, 그렇다면 내 사진집의 제목은 ‘인간’이 돼야한다고 생각했죠”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인간’하면 남녀노소가 다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도 장애인도 다 들어가잖아요? 저는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인간을 찍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최민식 씨가 인간을 담아내는 방식은 철저한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은 사실적인 것,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진실을 말합니다.” 그는 사진을 찍으려면 삶의 현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림이나 문학은 관념으로 창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진은 그게 불가능하죠. 또 다큐멘터리는 연출해선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실적인 것을 담아야합니다. 이게 진짜 리얼리즘이죠.” 최 씨가 피사체를 대하는 태도다. “요즘 사진을 보면 포토샵이다 뭐다 해서 조작이 많아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조작은 절대로 사진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최근에 최민식 씨는 ‘구식’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는단다.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하더라고요. ‘선생님 방식은 오래됐고, 지금 사진의 조류는 촬영기법에 있다’고. 이 말을 듣고 ‘야단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의 사진은 세상에 대한 ‘기록’이고 ‘역사’다. “다큐멘터리는 5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제가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진짜 사진의 본질은 그 ‘역사성’에 있습니다. 그 역사성을 지탱하는 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고요.” 그는 기법만 아는 사진을 비판한다. 최 씨는 ‘올바른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당부한다. “그런 내 생각과 사진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너무 고맙죠”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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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하면 남녀노소가 다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도 장애인도 다 들어가잖아요? 저는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인간을 찍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최민식 씨의 사진은 가난했던 어린 날의 기억으로 빚어진다. “황해도 연백군에 살았습니다. 가난해서 동생들은 초등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죠. 1년을 농사지으면 7개월을 먹고 5개월을 굶었습니다. 가난했죠.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농부의 자식이었다. 최민식 씨는 어릴 적부터 막노동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며 살았다. 가난은 항상 그의 앞에 있었다. 그는 그런 가난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사진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의 ‘경험’이 사진을 만드는 가장 큰 부분입니다. 쓰라린 가난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스타이켄의 사진집을 봤을 때도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주위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고요.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아마 적어도 이런 사진을 찍고 있진 않을 겁니다.” 천주교 신자인 그의 세례명은 빈센시오다. 빈센시오는 프랑스의 성인이다. 주교였지만 관사에 고아원을 만들고 거기서 고아를 도와주는 삶을 살았다. 최민식 씨의 아버지는 빈센시오의 정신을 따르라며 그의 세례명을 정했다. “사진작가라면 박애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도 내가 그런 의식을 갖길 바랬죠. 아버지는 내가 밀레 같은 화가가 되길 바랬지만, 저는 사진작가가 됐죠.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사진작가가 뭔지도 잘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이나 본질은 다 같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는 크게 웃어보였다.최민식의 사진은 아직도 진행중 최민식 씨는 여전히 사진을 하고 있다. “나는 늘 시간이 아깝습니다. 놀 시간이 없어요. 나는 아직 ‘현역 사진작가’입니다. 눈도 잘 보이고 다리도 튼튼하죠.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사진을 하는 겁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사진을 찍을 겁니다.” 최 씨는 아프리카의 난민을 촬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예전부터 아프리카의 난민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상금을 받은 게 있는데 그 돈으로 아프리카 난민을 찍어볼 생각입니다.” 그에게는 외국인도 똑같은 사람이다. “어쨌든 인류는 하나잖아요. 아프리카에서는 5초에 어린이가 한명씩 죽는답니다. 부족 간 싸움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난민이 되고요. 이런 걸 외면할 수만은 없죠.” 82세의 그는, 아직도 전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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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많이 가진다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니까요.” |
최 씨는 대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을 것을 권유한다. “독서할 시간을 안 주는 사회도 문제지만, 책을 안 읽는 학생들도 문젭니다. 말했지만, 사람에게는 ‘경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즘 세대들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적습니다. 가난도, 전쟁도 경험하지 못했죠.” 독서가 젊은 사람들의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주문한다. “두 군데 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는데,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대학이 학문도 없고 낭만도 없는, 그냥 취업양성소가 되고 있어요. 미대 다니는 학생이 경찰관 시험을 준비하는 걸 보면서, 좀 씁쓸했습니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많이 가진다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