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에 둘러 앉아 파전, 제육볶음과 함께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학생들의 모습, 봄이 무르익을 즈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축제 전부터 6월 초까지 학관 앞, 자하연, 해방터, 농대식당 앞 등에서는 연일 장터 판이 벌어진다. 올해엔 작년에 없던 색다른 장터도 눈에 띈다. 소박하게 시작한 서울대 장터 점점 활성화 돼학내 장터는 80년대 중반 즈음 등장했다. 해방터에서 21년 째 김밥을 팔고 있는 안병심(75) 씨는 “내가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도 장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김대진(임학 88) 씨는 “내가 입학했을 무렵엔 장터가 많지 않았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터를 열기도 했지만 농활비를 마련하는 등 돈을 벌기 위해 장터를 열기도 했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장터가 활성화된 건 90년대 이후다. 김진아(원예 92) 씨는 “매 학기에 한 두 번은 장터를 했다. 과 운영비 벌기 위해서, 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선배에게 기금을 마련해주느라 장터를 했다”며 당시 장터 모습을 회고했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장터의 고정메뉴인 파전, 순대, 막걸리 등이 등장했다. 오늘날 장터들이 주로 1, 2학년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과 달리 90년대 초에는 3학년 집행부들이 주축이 돼 움직였다. 배중환(식물생산 04) 씨는 “내가 신입생이었을 때는 학번에 관계없이 다들 장터에 참가했는데 요즈음엔 학점, 자격증, 취업 등으로 3학년만 돼도 과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고학번들을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서울대 장터와 함께한 이들서울대에 장터가 들어선 때부터 20년 이상 장터를 열어 온 사람들이 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는 축제 때마다 학관 앞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맛있기로 소문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유가협은 민주화 열사의 가족들로 구성된 단체로 할머니들이 자신의 아들 사진을 셔틀정류장에 걸어놓고 음식을 판다. 이번 축제에서 오징어숙회를 팔던 할머니는 “여기 걸려있는 게 내 아들”이라며 학생들에게 그들을 기억해주기를 부탁했다. 가톨릭학생회(울톨릭)는 79학번 한희철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유가협과 지속적으로 연대해 장터를 열고 있다. 울톨릭 회장 심재홍(인류 08) 씨는 “장터를 열기 전에 울톨릭 사람들끼리 모여 연대 장터의 의미에 대해 다시 떠올리곤 한다. 음식은 유가협에서, 그 외 장소나 천막 대여, 회계업무 등은 울톨릭에서 맡고 있다. 수익금은 유가협 기금으로 사용된다”고 말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도 학교에서 장터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전철연 조직위원인 김소연 씨는 장터를 여는 이유에 대해서 “학생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라 학생들 부모님과 똑같은 아저씨, 아줌마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며 투쟁에 함께 할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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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연) 장터 모습. 축제 때마다 학관으로 올라오는 길목에서 장터를 하며 전철연에서 하는 일을 알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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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들이 저기있어.” 유가협 장터에서 음식을 만들던 할머니의 자식들 사진이 걸려있다. |
장터, 색다르게 즐겨보자
오랫동안 장터 자리를 지키며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학생들의 발길을 붙잡는 장터들이 있다. 자하연 앞을 운치 있는 와인바로 만든 와인 동아리‘WAins’는 올해 처음으로 와인 장터를 열었다. WAins 부회장 정재연(경영 07) 씨는 “작년 11월에 처음 WAins 모임을 가졌고 올해 처음으로 와인 장터를 기획했다. 와인과 와인에 어울리는 치즈, 까나페 등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칵테일 동아리 ‘휴림(休林)’은 올해 세 번째 칵테일 장터를 열었다. 휴림 회장 정희윤(재료공학 07) 씨는 “휴림은 칵테일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다. 동아리 회원들이 그동안 배운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시연해보고, 동아리도 홍보하기 위해 칵테일 장터를 기획해 계속 열고 있다”고 말했다. 휴림의 장터에서는 진토닉, 블루하와이, 피나콜라다 등 10가지 종류의 칵테일을 3000원에 제공했다.아예 술을 안 파는 장터도 있다. 2007년에 창립된 커피동아리 ‘카페인’은 올해 두 번째 커피 장터를 열었다. 카페인 회장 정은지(작곡이론 07) 씨는 “커피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커피장터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카페인 장터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더치커피(Dutch coffee)를 판매했다. 더치커피는 뜨거운 물로 내리는 드립커피와 달리 찬물로 커피를 내려 몸에 유해한 카페인 함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내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어 학내 커피전문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 씨는 “바리스타가 만든 커피보다 개인 취향에 맞게 직접 만든 커피가 더 맛있는 경우가 많다. 동아리 사람들은 연유를 넣은 더치커피를 즐겨 마시곤 했는데 이번 장터에 내 놓으니 반응이 꽤 좋았다”고 말했다. 제육볶음이 없는 장터는 허전하다? 고기 없이도 멋진 장터를 연 사람들이 있다. 환경동아리 ‘씨알’에서는 작년에 채식장터를 열었다. 채식장터에서는 두부김치나 어묵 없이 간장으로 만든 궁중떡볶이, 단호박찜 등 다른 장터에서는 보기 어려운 메뉴들을 내놓아 학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전 씨알 회장인 이제호(산업인력개발 07) 씨는 “식습관의 지나친 육식화와 점점 증가하는 공장형 축산업은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환경문제 또는 동물권 보장 등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교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씨알에서는 “채식주의자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환경을 아끼자는 마음에서 채식장터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장터에서는 반드시 음식을 팔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장터도 있다. 자하연 앞에서 여학생들의 발길을 붙잡은 곳은 액세서리 장터. 금속공예과에서는 작년 봄부터 액세서리 장터를 열고 있다. 금속공예과 장터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직접 귀걸이, 목걸이 등을 만들어 판매한다. 이번 봄 축제 장터에 참여한 대학원생 김미숙(금속공예 08) 씨는 “금속공예과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 과 홍보 차원에서 장터를 열고 있다”며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서양화과에서는 크로키를 그려 판매했다. 신혜원(서양화 09) 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과 홍보 차원에서 크로키 장터를 기회했다”고 말했다. ‘IVF’와 ‘SIFE’에서는 이번 축제 때 장터에서 공정거래무역물품을 판매했다. IVF는 이번 장터를 위해 아름다운가게에서 공정무역 쿠키와 커피를 들여와 팔았다. SIFE는 공정무역 홍차를 판매했다. SIFE 회장 이지홍(경영 03) 씨는 “지난 공정무역축제에 참가했을 때 한 분과 인연을 맺어 공정무역 홍차 판매를 부탁받아 판매를 하게 됐다”며 공정거래무역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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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인의 장터 메뉴판. 더치 커피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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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과 크로키 장터. 서양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직접 초상화를 그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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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공예과 액세서리 장터. 대학원생들이 직접 만든 귀걸이, 목걸이 등을 팔고 있다. |
우리와는 조금 다른, 다른 학교의 장터
다른 학교는 장터를 ‘주점’이라고 부른다. 명칭과 걸맞게 메뉴도 어묵탕, 소세지야채볶음, 마른안주 등 술집 안주로 구성돼있고, 서울대와는 달리 소주 판매도 가능하다. 서울대 장터에서는 1, 2학년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숭실대와 동국대는 전 학년의 학생들이 참여한다. 숭실대에 재학 중인 박헌진(정보통신전자공학 08) 씨는 “숭실대 장터에서는 1, 2학년들이 주로 짐을 나르거나 서빙을 하고 3, 4학년들이 물품관리나 회계를 맡는다”고 말했다. 동국대를 졸업한 구남혁(정치외교 03) 씨는 “동국대 장터는 집행부인 3학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2학년들이 일을 많이 하지만, 1학년은 아직 과가 결정되기 전이라 장터에 참여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내기들은 따로 모여 자기들만의 장터를 열기도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화여대는 학교 장터에서 주류를 판매하지 못한다. 대신 자몽, 오렌지, 레몬, 체리 등 여러 종류의 에이드와 스무디, 커피 등을 장터에서 판매하며 이에 어울리는 치츠케이크, 고구마케이크, 티라미스 등도 함께 판다. 이화여대에 다니는 정지은(지리교육 08) 씨는 “주류 판매는 금지돼 있지만 이화이언(이화여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비밀의 화원’이라는 클럽 파티를 기획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축제기간에만 장터를 열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연세대에 재학 중인 정찬권(경제 08) 씨는 “대동제기간 외에 장터를 열면 소음 때문에 학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장터를 열지 못하게 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장터장터를 하려면 학생과에 사용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캠퍼스 이용 규정 제5조 3항에 따라 장터에서 주류를 판매하려면 사전에 총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주류 판매에 대한 허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지도팀장 권오황 씨는 “원칙상으로 주류 판매를 금지하지만 아예 못 팔게 하기엔 학생들의 항의가 너무 심해서 소주 외에 도수가 낮은 술에 대해서는 못 본 척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 많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장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잔디밭에 토하고, 길가에 드러눕는 흉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고은비(사회 08) 씨는 “학관 앞에서 어떤 남학생 하나가 장터에서 술을 먹고 취해 토하는 모습을 봤다. 식당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해 비위가 많이 상했다”며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장터가 끝난 후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것도 문제다. 권 팀장은 “예전보다는 청소를 잘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나 비정규직 청소부만 장터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아니다. 학관 앞에 있는 우체국은 장터 쓰레기 때문에 서비스평가에 안 좋은 점수를 받을까봐 항상 노심초사다. 오희영 국장은 “우체국도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서비스업 모니터링 평가를 받는다. 장터 후에는 학생들이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을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직접 주우러 다닌다”고 말했다.장터는 우체국 업무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 무거운 우편물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우체국 바로 앞까지 차가 들어와야 하는데 장터 천막 때문에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것. 오 국장은 “Teps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이 많기 때문에 우편물 배달차가 두 대씩 들어오곤 하는데 장터 하는 사람들 때문에 차가 진입을 못할 때가 다반사다. 심지어 우체국 문 앞까지 장터 천막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장터 소음으로 인해 고객들과 대화가 불가능 할 정도”라며 불편을 토로했다. 학교, 또는 학생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체국이 들어선 것이지만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배려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장터로 인해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자발적으로 수업이 아니라 장터를 선택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손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고은비 씨는 “장터를 하다가 빠지기 미안해서 결국 수업에 하나도 안 들어갔다”고 말했다. 학교에 공부를 하러 왔다가 수업은 하나도 안 듣고 장사만 한 셈이다. 이번 봄에 장터를 한 한카니(경영 07) 씨는 “장터를 하는 사람이 적어 중간에 빠질 수가 없었다. 전공수업을 빠졌는데 나중에 책으로 혼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