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택배기사를 투사로 만드나

5월 16일, 화물연대는 조합원 총회를 열고 총파업을 결정했다.연단 위에 고 박종태 씨의 영정이 걸려 있다.지난 5월 16일에 대전시 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보수언론은 집회에 등장한 ‘죽창’만을 앞 다퉈 보도했다.고 박종태 씨가 ‘노동탄압 중단하라’며 목을 매단 것도, 대한통운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한 것도 너무 쉽게 그 목소리를 잃었다.이에 사람들은 “박종태를 살려내라”며 만장을 꺾어 죽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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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화물연대는 조합원 총회를 열고 총파업을 결정했다. 연단 위에 고 박종태 씨의 영정이 걸려 있다.

지난 5월 16일에 대전시 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보수언론은 집회에 등장한 ‘죽창’만을 앞 다퉈 보도했다. 고 박종태 씨가 ‘노동탄압 중단하라’며 목을 매단 것도, 대한통운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한 것도 너무 쉽게 그 목소리를 잃었다. 이에 사람들은 “박종태를 살려내라”며 만장을 꺾어 죽창을 만들었다. 이날 시위에서 연행된 사람은 500명에 달했으며, 전경 가운데에서도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아직도 아픔이 무겁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회사와 기사, 종속적 노사관계에 있어”대한통운 본사 앞에서는 지금도 매일 저녁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는 화물연대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각계의 참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화물연대 법규팀장 박상현 씨는 “원래는 대한통운 정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했는데, 지금은 그 근처에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집회가 끝나고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고 박종태 씨의 빈소가 마련된 대전중앙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원 뒤편에는 천막이 설치돼 있었다. 천막에는 대한통운에 의해 해고된 택배기사들이 30명가량 모여 있었다.조합장인 김성룡 씨는 대뜸 막걸리를 한 잔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택배기사들은 조소 어린 말투로 자신을 ‘소사장’이라 칭한다. 법적으로 택배기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주다. 이들은 택배회사와 위탁계약을 맺고 화물을 운반한다. 그리고 건 당 수수료를 자기 몫으로 챙긴다. 자리에 모인 택배기사들은 모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지난 2008년 1월, 대한통운 광주지사는 계약금을 기존 920원에서 950원으로 올린다는 약속을 구두로 체결했다. 그러나 두 달 후 이 사실은 없던 일이 됐으며 오히려 수수료를 40원 인하하겠다고 통보했다. 택배기사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했고, 대한통운은 문자를 통해 ‘복귀하지 않은 차량을 자동으로 계약 해지 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박상현 부장은 “구두 협의사항도 엄연한 협의다. 하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 우리가 사업주이기 때문에 형사소송이 아니라 민사소송을 할 수밖에 없는데, 원래 민사소송이란 게 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택배기사들의 위탁계약서를 살펴보면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있고, 벌과금 등의 징계규정도 마련돼 있다. 박 부장은 “이런 사실만 봐도 택배회사와 기사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고, 종속적인 노사관계임을 알 수 있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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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7시 30분, 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린다.

하루 11시간 노동, 산재처리도 안돼

택배 일을 3년 간 했다는 최학렬 씨는 “우리는 노예 같은 삶을 산다”고 말한다. 택배기사들은 아침 7시까지 회사로 출근하고 밤 9시까지 일한다. 하루 11시간 근무이지만 이것도 운이 좋을 때 이야기다. “배달을 끝내고, 다음 날 물건까지 싣고 나면 자정이 지나기 일쑤다. 일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하면 백만 원 남짓의 돈을 버는 것”이라는 게 최 씨의 설명이다. 김성룡 씨는 “패스트푸드 아르바이트가 우리보다 낫다. 그거 하다가 죽을 일은 없지 않냐”고 말한다. 택배기사들은 4대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2003년 택배기사들의 요구로 산재보험이 실시됐지만 이도 허울뿐이다. 산재보험은 사업자가 보험료를 부담해야하는데, 택배기사들은 전액을 자신이 부담한다. 박상현 부장은 “지금 산재보험에 가입된 차주는 10명도 채 안된다. 정책의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네 살배기 아들이 눈에 밟혀”삼남매의 아버지인 오영태 씨는 한 때 ‘잘 나가는’ 택배기사였다. 택배기사는 업체로부터 구역을 배정받는데, 물류량이 많은 지역을 배정받으면 그만큼 수입도 높다. 잘 나가는 택배기사는 물건을 많이 배달하는 택배기사다. 오 씨는 “잘 나간다고 해 봤자 식구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외식하고, 영화 한 번 볼 정도다. 적금 같은 건 꿈도 못 꾼다”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위에서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도 형은 그만하면 살만했지 뭐. 어차피 지금은 전부 백수지만.” 한 바탕 웃음이 지나가지만 긴 침묵이 곧 뒤따른다. 오영태 씨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국가전복을 도모하는 폭도로 보이나.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오 씨는 천막 안에서도 가족 생각이 간절하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아이들 사진을 보여준다. “얘가 막낸데 이제 4살이다. 한참 아빠를 찾을 시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래도 나는 집에 자주 가는 편이다. 한 달에 두 세 번은 집에 간다. 여기 세 달 넘게 집에 못 들어간 사람도 많다”고 오 씨는 덧붙였다. 김민진 씨는 “최근 화상통화가 되는 휴대폰을 장만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곧 주위에서 가족들 이야기가 나온다. “누구보다 가족이 그립다. 당연한 것 아닌가. 어서 일자리를 찾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택배기사들은 말한다. “가족들과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권, 그 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게 최학렬 씨의 설명이다.“누가 우리를 투사로 만드나”그런 그들도 요즘 “변했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최학렬 씨는 “내가 원래 욕 한번 안하고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광주에서 회사가 우리를 상대로 문을 걸어 잠갔다. 같은 택배기사가 문을 잡고 있는 걸 봤는데, 욕이 튀어 나오더라”고 말했다. 김성룡 씨는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이 사회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덧붙인다. 최 씨는 “뉴스에서 집회장면이 방송됐는데, 거기 내가 나왔다. 딸이 ‘아빠는 왜 전국적으로 얼굴을 팔고 다니냐’고 한 마디 하더라”고 말하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5월 16일에 있었던 집회 이야기가 나온다. 오영태 씨는 “집회 도중에 조합원 한 무리가 전경 열 명 정도를 둘러싼 일이 있다. 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전경이 무슨 죄냐. 얼른 돌아가라고 보내줬다”고 말했다. 김민진 씨는 “집회가 끝나고 뒤에서 연행해 올 줄 알았으면, 가만히 안 둘걸 그랬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 씨는 “전경도 다 우리 동생이고 조카잖아. 때리고 싸우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냐”며 김 씨를 다독인다. 화물연대 조합원 가운데 20명은 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오 씨의 동생도 이번에 경찰에 연행됐다. 오 씨는 “면회를 갔는데 약도 못 주게 하더라. 곤봉으로 그렇게 맞았는데, 몸이 쑤실텐데”라며 연신 동생 걱정을 한다. 성한길 씨는 “예전에는 훈방도 잘 시켜줬는데, 이제는 화물연대 조끼만 입고 있어도 연행한다. 어떻게든 검사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뭐”라고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물류는 줄어드는데, 기사는 많아이들을 괴롭게 하는 건 물리적인 아픔만이 아니다. 김성룡 씨는 “최근에 한 신문에 대한통운이 낸 광고를 봤다. ‘박종태 씨는 대한통운과 상관이 없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했다’고 적혀 있더라. 문자로 해고 통보하는 게 대화인가?”라고 반문했다. 오영태 씨는 “회사가 광고를 한 건 그렇다 쳐도, 다른 택배기사들이 광고를 통해 우리를 비난한 건 정말 못 참겠더라. 같이 힘든 처지에 그렇게 우리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하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도 컸다. 최학렬 씨는 “회사 직원들은 10%씩 임금이 오르는데, 우리는 그나마 쥐꼬리만큼 있던 수수료도 깎겠다고 난리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화가 나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박상현 부장은 “물류는 줄어드는데, 기사는 많기 때문에 수수료가 점점 낮아진다. 낮은 가격에 일하는 기사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기사들이 살 길은 열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성룡 씨는 학생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눈을 뜨고 세상을 봐야한다. 등록금을 깎는 것만이 싸워야할 전부가 아니다. 대학생들도 다 ‘예비 노동자’다. 노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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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종태 씨의 빈소가 설치된 대전중앙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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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뒤편으로 화물연대의 천막이 있다.

천막 안에서의 이야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자는 조심스럽게 “큰 집회가 있었는데, 운전하는데 불편하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택시기사 오창원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뗐다. “사람이 죽었잖아요.” 오 씨는 “사람이 제 목숨 끊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다 먹고 살기 힘들지만,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에 길거리로 나온 것 아니겠나. 이해해야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화물연대는 5월 16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총파업을 결정한 상태다. 싸움이 끝나는 순간 편하게 잠들겠다던 고 박종태 씨의 장례식은, 아직 치러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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