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이야기’처럼 했을 때 짜릿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 작년 학관 618호 앞에서 지원서를 손에 들고 계속 고민했던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해야 할 누군가의 이야기,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실을 찾아야한다는 기자의 사명, 그 선을 넘었을 때 돌아올 파장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아직도 첫 취재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관악구청과 노점상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비판도 진실도 놓쳐버렸다. 그 후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진실을 찾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애초에 기자 스스로 진실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도 모자란데다 당사자가 아닌 ‘남’이기에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학생기자로서 감당해야하는 은연 중의 무시 속에서 진실을 찾는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이번 인권위 취재도 마찬가지였다. 행안부를 취재하는데 일주일 내내 다섯번은 독촉전화를 했고, 마감 전까지 인터뷰를 해줄 수 없을 거라는 통보도 들었다. 급기야는 “이런 상황에선 인권위 입장만 실을 수밖에 없네요”라고 떼를 써버렸다. 2시간 만에 날아온 이메일 답변서 한 통. 약이 올랐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이 있다면, 먼저 자신있게 말해달란 말이다. 대체 왜, 불리한 상황이 와야만 입을 여는 것일까. 또 취재 얘기다. 4대강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직접 통화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한다지만, 예상 질문을 미리 보고 나서야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은 건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인터뷰가 가능할거라 나를 안심시켰던 비서는 “요새 너무 바쁘세요”라며 안쓰러울 정도로 궁색한 이유를 댔다. 며칠 전 인터뷰한 인권운동가 명숙 씨가 생각났다. 전날 밤을 샜다면서도 인터뷰에 응하는 그녀의 눈은 빛났고 그녀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있었다. 누가 더 바쁜지는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할 필요도 없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의 무게는 달라보였다. 기자는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명제일까? 진실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과연 기자만의 책임일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자생활 1년 반 동안 내가 품어왔던 의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기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혹자는 편파적인 기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라 욕할지도 모르겠다. 정 억울하면 마이크 앞으로 나와 속시원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 당신이 진실이라 믿고 확신하는 만큼, 마이크의 볼륨을 더 높여 말해줘도 좋다. (사실 나는 그게 더 편하다.) 나는 끝까지 들어줄 준비가 돼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 이야기’처럼 했을 때 짜릿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작년 학관 618호 앞에서 지원서를 손에 들고 계속 고민했던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해야 할 누군가의 이야기,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실을 찾아야한다는 기자의 사명, 그 선을 넘었을 때 돌아올 파장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다.아직도 첫 취재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