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거꾸로 가는 MB정부, 그 안에서 시민운동을 ‘묻다’
고기 없는 세상, 상상해보셨나요?

거꾸로 가는 MB정부, 그 안에서 시민운동을 ‘묻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92학번.2006년에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입법운동의 구조와 동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99년부터 2004년까지 참여연대에서 일했다.지금은 희망제작소 대안센터장이며, 싱크탱크 연구를 진행 중이다.연구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끄는 생각’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1987년, 한국사회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독재타도”를 외쳤다.그 피맺힌 목소리는 결국 군부 정권을 물러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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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사회학과 92학번. 2006년에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입법운동의 구조와 동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참여연대에서 일했다. 지금은 희망제작소 대안센터장이며, 싱크탱크 연구를 진행 중이다.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끄는 생각’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1987년, 한국사회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 피맺힌 목소리는 결국 군부 정권을 물러나게 했다. 군부 정권의 퇴진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성취감에 고취됐다. 사람들은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날을 지새웠다. 시민운동은 거기서 시작됐다. 초기 시민운동은 기존 민중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 ‘사회가 변했다. 폭력이 아닌 말과 논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거리에는 다시 “독재타도”란 구호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시민운동은 하루가 다르게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시민운동이 설 땅을 잃어가는 지금, 은 MB시대의 시민운동에 대해 물어봤다.

이명박 정부 이후, 시민 사회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보수 세력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30년 쯤 후퇴된 것 같다. 정권을 획득한 과정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졌지만, 현 정부의 행태나 사고방식은 상당 부분 과거로 회기했다.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이 현실 정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게 후퇴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렇다면, 시민운동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이 아닌가. 정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는 지난 10년 간 상당부분 커져 있었는데냉정하게, 지난 10년 간 시민운동을 평가하면 아쉬운 점은 분명히 많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제도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권력감시형 운동’이 시민운동의 주요한 부분으로 정착됐다고 생각한다. 이 것이 정치권력의 변화만으로 취약함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청와대 행정관이 성접대를 받았다, 청문회 과정에서 부도덕한 측면이 드러났다는 등의 말이 있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시민운동이 문제를 밝히고, 지적하는 능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역량은 인터넷 환경의 발달, 정보공개의 확대로 10년 전보다 늘었다. 문제는 그 지적이 사회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거다. 지난 정권을 보면, 청문회 과정에서 자그마한 과오 때문에 사퇴한 경우도 많다. 현 정권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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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이 문제를 밝히고, 지적하는 능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문제는 그 지적이 사회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정권이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만큼 시민운동은 나약한가

현 상황이 시민운동영역만의 한계는 아니다. 운동과 정치가 결합해야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데, 야당정치세력이 소수세력으로 몰락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절대 다수여당으로 군림한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다수였지만, 당시에는 보수 언론과 야당의 결집이란 게 있었고 그것이 특정 여론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 여론이 여당이나 청와대를 압박하는 구도가 있었다. 지금은 반대 상황이다. 거대 여당과 보수 언론이 결착해, 소수 야당과 시민운동세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공론화되지 못하게 한다. 시민운동 자체보다 외부 상황, 정치적 여건의 변화가 현 상황의 원인이란 말인가시민운동이 계속 잘하고 있기만 한 건 아니다. 운동이 기반하는 토대는 ‘대중’에 있다. 지금 보면 대중과 운동 사이의 괴리가 커졌다. 이번 촛불시위는 그런 걸 잘 보여준다. 촛불시위는 운동세력이 동원하거나 지도한 게 아니다. 과거 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중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촛불시위를 통해 대중들과 운동진영의 소통 방식이 다르고, 운동진영이 많이 서툴다는 걸 느꼈다. 정치적 변화, 사회적 변화가 분명히 있는데 운동진영은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변화와 혁신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시민운동이 위축됐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가장 큰가시민운동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고 누군가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커가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시민운동은 ‘내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테니, 나와 우리 조직을 지원해달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한편으로는 소액다수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운동가들의 생존이 지켜졌다. 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운동가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현 정부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기업들의 후원을 직간접적으로 막고 있다. 세금으로 이뤄지던 국고보조금, 지방단체가 시행하던 각종 프로젝트를 끊어버리고 있다. 그 지원이 관변단체, 보수단체로 불리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구속, 체포, 압수수색 등 강압적 방식을 동원해서 공포감을 유발하는 것도 문제다. 실제 운동가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있고 시민들이 선뜻 시민단체를 지원하지 못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도 문제다. 만원, 이만원씩 내서 후원하는 상황도 쉽지 않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이 중심이되고, 일부 자원활동가가 돕는 구조로 발전해온 현 시민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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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는 시민운동의 목을 조르고 말려죽이고 있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갖춘 사회운동이 공존하는 꼴을 못 보는 상황이다.”

그런 것들을 피부에 와 닿게 느낀 사건이 있었나

대표적인 게 촛불시위 이후 광우병 대책위 지도부가 검거 구속된 것이다. 실제로 시위 현장에서 수많은 시위자들이 폭력적인 진압을 당하고 연행되기도 했고, 각종 민형사상 책임을 졌다. 진압의 양상이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후원행사나 회비를 통해 운영되던 한 단체가 있는데, 이제는 기업들이 후원금을 내지 않는단다. 청와대에서 기업에 전화를 걸어 ‘후원하지 말라’는 유언 무언의 압박을 넣는다는 것이다. 현 정부는 시민운동의 목을 조르고 말려죽이고 있다. 물론 보수적인 시민사회운동은 활성화되고 있다. 이는 지난 정권 때부터 시작된 현상이다. 좋은 일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공존하고 경쟁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을 갖춘 사회운동이 공존하는 꼴을 못 보는 상황이다. 공공연하게 북한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단체를 거리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있지만, 다른 것은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이 활개를 치는 것은 문제다. 최근 시민운동이 위축을 비롯한 일련의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현 정부인가근본적인 원인이라 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원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변화는 정권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촛불만 봐도, 2008년에 처음 있었던 게 아니다. 2004년 탄핵국면에서도, 미군 장갑차 사건 때도 있었다. 당시 시민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게 ‘깃발논쟁’이다. 운동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니까 뒷 사람들이 깃발을 내리라고 소리친 것이다. 옛날 운동권들에게는 깃발이 매우 중요했다. 깃발을 들고, 깃발에 모이고, 깃발에 따르는 게 전통적인 패턴이었다. 그러나 당시 촛불을 든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깃발 밑에 설 수 없었다.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니까. 정권의 변화가 이런 현상의 원인이 아니다. 물론 현 정권이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과 운동 사이의 괴리나, 소통의 불일치 문제 등 사회 저변의 문제가 더욱 큰 게 사실이다.제도적 틀 안에서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초기 시민운동의 취지였다. 이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시민운동을 말하며 등장한 단체들이 제도적 틀 안에서 운동을 하겠다고 말한 건, 역사적 맥락이 있다.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을 써야만 했던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도 노동자에게 불리한 제도를 유리한 방식으로 고쳐나가는 것이지, 노사관계를 전복시키려 하는 혁명적 계급운동은 한국에 거의 없다. 초기 시민운동에서 경실련 등의 단체가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을 낡은 것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시민운동은 제도적이고 점진적인 수준의 변화를 주장하는 합리적인 것이라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이런 의도적인 이분법에 반대하며 등장했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벽으로 갈라져야 하는 게 아니라, 다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참여연대의 생각이었다. 제도적 틀 안에서의 개혁은 ‘순응’과는 다르다. 지금 제도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그냥 확인하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제도를 만들자는 게 시민운동 진영이 주장했던 입법운동이다. 법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건 순응적인 방식이지만, 시민운동은 새로운 법과 정치를 만들고자 했다. 사실 지금은 ‘시민운동’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보수적 시민운동도 있고, 환경운동도 있고, 참여운동도 있다. 모두가 시민운동으로 불리지만, 점점 그 차이는 커지고 복잡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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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은 변했다. 지금 개인들은 정보를 얻고 소통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렇다하더라도 개인이 모여 존재하는 ‘조직’의 힘은 여전히 크다.”

결과적으로 시민운동의 성장이 다양한 운동, 특히 학생운동을 게토화시키고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현상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잘 따져봐야 한다. 시민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약화됐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학생운동의 쇠락을 바라지 않는다. ‘학생운동이 없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가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민운동가도 있으니까. 사회 변화에 걸맞는 운동의 형식과 조직 운영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노동운동, 농민운동이라는 기층 민중운동이 지도에 서고, 학생운동이 머릿수로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였다. 이 구조가 상당부분 와해됐다. 이 와해는 사실 시민운동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대학이 변했다. 예전 대학생들은 지금보다 문화적 주도력이 있었다. 취업걱정도 지금보다 적었고. 지금은 경쟁이 심화됐다. 과거 학생운동이 강한 조직력과 동원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기반이 깨졌다.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다. 남성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비정규직,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예전 노동운동의 중추가 지금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가 시민운동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나시민운동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운동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을 ‘말 안 듣는 일부’라고 생각하는 건 구시대적이다. 서구 사회의 예를 보면, 사회운동조직은 정부나 기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가진 집단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도 그 진행과정에 있었다. 현 정권은 세상이 변했다는 걸 몰랐는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잊어버렸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시민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는 역시 ‘조직’에 있다. 90년대 이후 존재해 온 특정 형태의 시민운동 단체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시민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 대중들은 변했다. 지금 개인들은 정보를 얻고 소통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존재하는 조직의 힘은 여전히 크다. 대중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소통된 것을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 실현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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