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스포츠, 음악, 춤, 연극… 동아리하면 떠오르는 활동들이다. 그런데 강의실 밖에서 ‘공부’를 하는 동아리가 있다. 학회나 학술 동아리들이다. 통상적으로 학회는 과반 자치단위에 속한 소모임을, 학술 동아리는 학교 전체나 단과대 생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모임을 뜻한다. 학회, 학생운동의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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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흥식 교수는 “군사정권 시절에는 학회와 학생운동이 운명을 같이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
처음에는 학술동아리가 없었고 학회라는 개념이 통용됐다. 학회의 기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순수하게 학술적인 목적에서 출발한 법대의 ‘법학회’가 있다. ‘사법학회’나 ‘국제법학회’는 모두 50여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편 대다수의 학회들은 60~70년대의 사회참여적 학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역사·철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회가 있었지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진지한 고민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있었다”며 초기 학회의 성격을 정의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독재정권은 사회비판이 곧 사회 저항으로 이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학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학생운동과 운명을 같이했던 학회들은 주로 음성적으로 운영되었고, 성립과 해체가 반복되기 일쑤였다. 조 교수는 자신이 활동했던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선배들이 구속되면서 해체됐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학회활동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학교 근처 술집이나 누군가의 자취방 등 곳곳에서 열띤 토론과 세미나가 열렸다.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는 학회도 있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조 교수는 “손때가 묻은 너덜너덜한 책을 몰래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학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누구나 학회에 가입하는 분위기라서 오히려 학과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이상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학’은 사라지고 ‘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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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회는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가진다. 사진은 사회학과 악반 소속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이 세미나를 진행 중인 모습. |
21세기가 된 지금, 독재정권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학회는 위기에 처했다. 학회가 본래의 목적의식을 잃고 술자리나 친목 위주의 모임으로 변질된 것이다. 신예지(사회학 07)씨는 “02, 03학번 선배들은 세미나도 자주했고 읽기 자료도 200쪽 이상씩 소화했는데 요새는 100쪽도 벅차다. 점점 세미나 참여 인원도 저조해지고, 횟수도 줄고 있다”며 변하는 사회대의 분위기를 털어놓았다. 세미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예전같지 않다. 뒷풀이에서 못다한 토론을 나눴던 풍경은 이제 추억이 됐다. 인문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김용관(철학 07) 씨는 “2년 전부터 반 학회가 침체되기 시작했고, 현재 학기중 세미나를 하는 곳은 한 곳 뿐”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씨는 인문·사회대의 학회가 쇠퇴하는 주된 이유로 학회의 운영방식을 꼽았다. 학회가 과반체제와 연동되기 때문에, 선배들이 전공진입을 하고나면 학회를 이끌어 줄 길잡이가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학회가 활발하게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회의 목적이 오락 문화로 전환된 경우도 있다. 경영대 한빛반에는 각각 술, 스포츠, 공연관람을 목적으로 하는 황무지·생나모·생사학회가 있다. 한빛반 이상목 씨(경영 06)에 따르면 생나모는 ‘생각을 나누는 모임’의 약칭으로 초기에는 학술적인 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 년의 과도기를 거쳐 스포츠 활동을 주로 하게 됐고, 지금은 학술에 관련된 활동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는 형식적 세미나는 존재하지만 학회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는 의미만 남았다고 덧붙였다. 학회의 위기, 원인을 파헤쳐보니 ‘법대신문사’는 학술 동아리가 동아리로 형태를 바꾼 대표적 예다. 이주원(법학 04)씨는 “법사회학회에서 갈라진 법대신문사는 처음에는 언론사보다는 언론을 하는 학술동아리의 느낌이 강했다”며 2004년까지 세미나가 진행됐다고 밝혔다. 이 씨는 학회가 위기를 맞은 원인에 대해 “학생사회의 침체, 세미나에 대한 고민과 목적의식의 약화”가 아닐까 추측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학회도 있다. 법대 소속인 ‘민주법학연구회(민연)’와 ‘현실과 철학(현철)’은 2005년에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민연은 활동 중단을 막기 위해 내부적 노력도 감행했었다. 차진태(법학 03) 씨는 “민연은 2004년 활력공방으로 명칭을 바꾸고 세미나-집회의 일률적인 운영방식을 벗어나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내부적 원인보다 더 견고한 외적 조건에 부딪쳐야 했다. 전반적으로 법대생들이 고시를 일찍 시작하면서 새내기는 물론 기존의 학회원들도 빠져나갔고, 결과적으로 민연의 활동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신예지 씨도 “학회보다는 고시를 하거나 스펙을 쌓도록 압박하는 사회가 학회 위기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97년을 전후로 경영대에는 경영·재무 관련 학술 동아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소위 취직에 유리하다는 경영대 학술동아리들은 4~5 대 1의 경쟁률을 자랑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생은 “경영대 학술 동아리들은 해외 유수 기업에 취직한 선배들 사진을 사용해 포스터를 만든다. 이것만 봐도 학회보다는 취업스터디에 가깝지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서 인기가 많다”고 밝혔다. 이는 사회비판적인 학회와 실용학문을 다루는 학회 간의 양극화 현상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조흥식 교수는 그 이유로 “민주화로 인한 비판적인 사회문제 의식의 자연스런 퇴조와 개인주의의 확산, 그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 확산과 분화,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을 들었다.그래도 학회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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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회가 매력적인 공간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박기원 씨. |
학회가 친목 위주의 성격으로 바뀌거나 개인의 성공을 위한 활동에 치중하는 것과 달리 본래의 목적을 이어가고자 하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고전을 읽자 세상을 보자’는 모토로 2004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인문학회’는 학내뿐 아니라 학외에서도 인문학 강연과 토론이 가능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전부터 장애인작업장 등에서 꾸준히 자원활동을 했지만 인문학을 하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실천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2007년 2학기부터는 클레멘트 코스를 진행해왔다. 이는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처음 만든 클레멘트 코스를 본딴 것이다. 클레멘트 코스는 빈민, 노숙자 등 약자들이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 삶을 성찰하도록 도와 한 사회의 시민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인문학회는 2007년 2학기부터 지난 학기까지 저소득층 청소년과 관악주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와 토론을 진행했다. 막상 시작했지만 첫 시도는 만만치 않았다. 학내와 달리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홍보활동은 쉽지 않았다. 코스의 특성상 지속적으로 강연이 이뤄져야 하는데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오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클레멘트 코스는 지난 학기까지 꾸준히 운영됐다. 2008년 2학기에는 ‘지역구민과 함께 하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무료 인문학 강의를 진행했다. 한국근현대사, 한국정치일반, 러시아문학 등 세 가지 주제로 강연과 토론이 이어졌다.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활프로그램을 운영하던 관악자활센터와 협력해 보다 짜임새있는 운영이 가능했다. 인문학회장 박기원(심리 06) 씨는 “경험 자체가 소중했다”며 “대학 동아리와 지역사회가 실제로 접할 수 있었고 함께 얘기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성과”라고 소감을 밝혔다. ‘통합과학연구회(통과연)’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학술동아리 중 하나다. 1991년 시작돼 학생운동의 역사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인문 07) 씨는 “페미니즘도 마르크스주의도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관점들을 총체적으로 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통과연은 ‘방향있는 열정, 실천하는 과학’을 모토로 오픈강연회와 세미나, 포럼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3~4월 중 씨알 등 다른 학술동아리들과 함께 학술주간 행사도 연다. ‘학술사회동아리가 떴다’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학술주간에서 통과연은 학술극 포럼 ‘어느 순박한 금융인의 살인일지’를 준비했다. 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포럼을 기획한 것에 대해 자연 씨는 “금융에 대해 감정적 반응들이 많은데 이 감정들을 파고들어 금융의 역사 등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고 의도를 밝혔다. 여기서 통과연은 금융이 탄생, 성장하고 괴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재판극 형식으로 풀어나갈 예정이다. 자연 씨는 덧붙여 “단순한 싫고 좋음을 떠나 금융이 무엇인지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기원 씨는 “학술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잃은 학회가 ‘학회’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학회의 의의를 설명했다. 또한 “새맞이에서 보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새내기들이 결코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학회 스스로도 학술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회가 사람들이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