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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목 교수는 “감추어진 진실을 파악하는 이성의 힘을 키우는데 <걸리버 여행기>는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고 말한다. |
*‘라퓨타’, 걸리버가 세 번째 여행에서 다다르게 되는, 하늘을 나는 이 섬은 동화적 상상력의 걸작으로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는 이러한 일반적 인식을 대표한다. 하지만 ‘Laputa’는 실은 ‘la puta’라고 읽힐 수 있고,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권에서는 ‘창녀’를 뜻하며, 18세기 초 스위프트 작품의 주된 대상인 교양 있는 독자층에게는 분명히 그렇게 – 그리고 기분 나쁜 충격을 동반하며 – 이해됐으리라는 점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문 것 같다.하지만 ‘라퓨타’ – ‘라 푸타’라고 읽고 싶지만 관례를 따르자면 – 가 하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명칭이 가진 여러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라퓨타’는 국왕이 사는 움직이는 궁정이다.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가 말을 듣지 않을 때, 국왕은 “그들을 복종시킬 두 가지”, 그러나 실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첫째의, 그리고 가장 온건한 방법은, 불복종하는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의 상공에 성을 정류시킴으로써, 그들로부터 햇빛과 비의 혜택을 박탈할 수 있고, 따라서 그 곳 주민을 기근과 질병으로 벌할 수 있다. 만약에 그들의 죄가 더하다면, 동시에 큰 돌을 하늘에서 투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계속 저항하거나, 폭동을 일으킨다면, 국왕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여, 섬 자체를 그들의 머리 위에 하강시킨다. 그러면 사람이고 집이고 모두 파멸되고 만다.(조나단 스위프트, 송낙헌 역, ,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pp. 195-196.)상상해 보라. 저항의 대가로 가장 ‘온전한’ 경우, 태양과 비라는 자연의 혜택을 빼앗고, 바위덩어리로 폭격을 하고, 나아가서는 문자 그대로 주민을 ‘깔아뭉개는’ 폭력적 지배라니! 이제, 책의 화자인 걸리버가 너스레를 떨며 부인했던 단어의 어원이 이해된다. “지금은 안 쓰는 ‘랖’이라는 말은 ‘높다’라는 뜻이었고, ‘운타’라는 말은 ‘통치자’라는 뜻이었다”(p. 184). ‘지배’를 뜻하는 ‘dominate’라는 단어는 ‘높은 곳에서 굽어보다’라는 뜻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퓨타’야 말로 모든 의미에서의 ‘domination’의 뛰어난 시각적 상징이 된다.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라퓨타’가 상징하는 폭압은 상상의 세계에 국한되는 것도, 일반적인 정치의 해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걸리버는 ‘라퓨타’의 지배 방식을 설명한 후, ‘3년 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저항과 폭력적 진압, 그리고 그 폭압의 실패를 전한다. 반항의 중심이 된 도시의 이름은 ‘린달리노(Lindalino)’다. 이 도시의 이름을 잘 살펴보면, 두 개(double)의 ‘lin’이라는 글자가 있다. 즉 이 도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을 지칭한다. ‘라퓨타’는 ‘창녀 같은’ 영국 왕실의 아일랜드에 대한 잔인한 식민 지배를 고발하기 위해 고안한 문학적 상징인 것이다.**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 글을 쓰는 행위는 투옥, 고문, 때로는 생명의 박탈에까지 이르는 정치적 박해를 가져왔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생각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불과 10년 전 까지만 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상처럼 보였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생각을 전해야 할 당위성과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기본적 필요성 사이에서 고민했고, 그 결과 독특한 양식의 글쓰기 방식들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을 통틀어 ‘이중적 글쓰기’라고 부른다. ‘행간의 글쓰기’라고도 불리는 이 ‘이중적 글쓰기’는 겉보기에는 사회 체제의, 지배자의 요구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되는 생각을 전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우리가 살펴본 는 바로 이러한 ‘이중적 글쓰기’의 대표적인 예다. 겉에 드러난, 정치적으로는 전혀 무해해 보이는 동화적 상상력 밑에, 실제로는 당시 사회에 대한,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숨어있다.이러한 ‘비판 문학’으로서의 기능이 의 여러 독특한 문학적 장치들을 설명해준다. ‘낯설게 하기’라는 이름으로 통칭할 수 있는 이 장치들은 무엇보다도 작품에, 줄거리에, 주인공에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는다. 감정적 동화는 문학적 카타르시스라는 행복한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이라는 이성의 능동적 행위를 저해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과거 여러 문화권의 많은 고전들에서 ‘이중적 글쓰기’의 원칙은 생각보다 훨씬 폭넓게 사용되어 왔고, 그것은 오늘날 생산되는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작품들의 구체적 예는 들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을 찾아내서 그 이중적, 또는 다중적 의미를 밝히는 것은 여러분의 이성이 해야할 몫이기 때문이다. 멀더와 스컬리의 말처럼 꼭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진실을 파악하는 이성의 힘을 키우는데 는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