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관악을 배회하고 있다. ‘일반 학우’라는 유령이. 총운위원과 집행부원, 대의원과 누리꾼들은 이 유령을 끌어들이기 위한 신성한 경쟁에 돌입했다. 사상 초유의 총학생회장 탄핵부터 평택 부상자 치료비 지원논쟁, 보건의료노조 사태까지 ‘일반 학우’가 언급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이쯤 되면 ‘일반 학우’는 모두에게 있어 절대적인 정당성의 원천이자 학내 사안의 최종 결정권자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일반 학우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특정 집단에 제한되지 않은 학생 전체의 여론을 의미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치의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의견, 즉 여론이 학생회의 의사 결정에 반영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지, 여론에 따르는 것은 항상 정당한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여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여론은 자주 바뀐다. 새로운 사건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의견을 바꾸게 된다. 어느 시점의 여론을 ‘진정한 여론’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그래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른바 ‘황라열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저널』이 지난 6월 1일에 실시했던 조사에서 사태 수습 방법으로 사람들은 ‘사과와 해명(63%)’을 꼽았다. 사퇴나 탄핵을 주장했던 사람은 24%였다(『서울대저널』 6월호 참조). 반면 전학대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이후, 6월 21~26일간 185명을 대상으로 한 2차 설문조사에서 ‘황라열 씨가 탄핵되는 것이 적절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42.7%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다’는 25.4%, ‘잘 모르겠다’가 28.6%였다. 3주일 동안 전개된 사건들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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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는 정확한 정보를 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든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혹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2차 설문조사에서는 그런 경향이 잘 드러났다. ‘진상규명 청문회’를 방청하지 않았으며, 결과문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청문회가 편파적이었다’고 답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됐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내린 판단이 그대로 여론이 되는 것이다. 그 중에는 ‘진상규명 청문회’와 ‘탄핵안 의결을 위한 전학대회’를 혼동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의 근거가 부정확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의견도 시간에 따라 쉽게 변화한다는 것은 의사 결정의 기준으로서 여론이 갖고 있는 치명적 약점이다. ‘일반 학우의 의견’은 아무도 몰라요 여론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 설문조사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잘 실시된 설문조사는 실제 여론의 분포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학내에서는 정확한 설문조사를 수행하기에 여러 제약이 있다. 설문조사에서는 설문 대상(표본)의 선정이 중요하다. 표본이 전체 집단의 특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조사 결과가 실제 여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물론 잘못된 표본 선정으로 인한 오차를 줄이기 위한 많은 방법들이 개발돼 있으나 이들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체 집단의 목록이 확보돼야 한다. 학교에서라면 등록생 명부를 얻는 것이 필요할 텐데, 대학본부 측은 여론조사 목적으로 명부를 제공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명부를 얻는다 해도 표본으로 선정된 사람들에게서 설문을 받는 것은 더욱 어렵다. 전문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한다면 어떨까? 한 여론조사업체에 조사 비용을 문의하니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표본 1인당 5천원~1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500명만 조사한다고 해도 최소 250만원이 드는 셈이다. 『서울대저널』과 같은 자치언론사로서는 선뜻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결국 설문조사에서 선택되는 방법은 ‘할당 표본추출(quota sampling)’이다. 전체 학생 집단의 단대별·학번별· 성별 비율을 구한 후 설문 응답자의 비율이 거기에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냥 하는 조사에 비해 더 정확한 것은 사실이나, 설문 대상 선정에서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설문조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표본 선정이 잘못됐다며 결과를 부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론을 확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총투표가 남아있지만, 학생 다수가 관심을 가진 사안이 아니라면 총투표는 성사되지 않는다. 성사돼도 그것이 결과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진 않는다. 예를 들어 51%의 학생들이 투표해서 51%의 찬성으로 가결됐다면, 찬성한 학생들은 실제로는 전체의 26%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조직화된 학생들이 총투표를 성사시켰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지 않는 한, 모두가 납득할만한 방법으로 ‘일반 학우의 의견’을 알아낼 수는 없다. 물론 설문조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잘 실시된 설문조사는 여론을 반영하는 중요한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인터넷, 생각만큼 유용하지 않더라 여론 형성과 학생 참여 확대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인터넷 공간도 흔히 생각하는 만큼의 보편성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의 2차 설문조사에서 ‘탄핵 사실을 어디서 처음 알게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누라이프’라고 답한 사람은 7.6%, ‘총학 게시판’이라고 답한 사람은 2.2%였다. 둘을 합쳐도 9.8%로, ‘친구들과의 대화(16.8%)’보다도 작은 비율이다. 탄핵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참고한 주요 자료를 묻는 질문에서도 ‘스누라이프’는 15.5%, ‘총학 게시판’은 9.3%로 작은 수치를 기록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갑론을박은 어떻게 보면 ‘찻잔 속의 태풍’과도 같은 형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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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2일 전학대회에서 탄핵안을 발의하는 장면. 청문회 이후 여론은 급반전, 탄핵 의결에 이르렀지만 그 과정과 정당성을 둘러싸고 후유증이 심하다. |
인터넷 여론 해석에서 더욱 주의할 점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다. 스누라이프 서울대광장에 황라열 씨 탄핵과 관련한 글이나 댓글을 단 사람들의 목록을 ‘진상규명 청문회 후 5일(6.8~12)’과 ‘탄핵안 발의 후 5일(6.12~16)’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다수의 글을 올리는 ‘적극적 이용자’가 탄핵안 발의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용자 수도 크게 변화해, 탄핵안 발의 이후 글을 쓴 사람은 59명, 댓글을 쓴 사람은 205명 늘어났다. 이렇게 담론 형성 과정에서 참여자가 짧은 기간에 큰 변동을 보이는 것은 인터넷 공간의 분위기를 여론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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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투표의 대안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인터넷 설문조사는 어떨까? 중앙전산원 측은 설문조사시스템 이용을 위해 우선 학생과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학생과 관계자는 “지금까지 설문조사시스템 이용 신청이 접수된 적은 없지만, 총학생회 등이 학생자치활동을 위해 필요한 내용에 관해 설문조사를 요청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밝혀 설문조사시스템 이용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참여도에 대해 중앙전산원 웹서비스팀 이덕임 팀장은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해도 응답률은 천차만별이다. 생협 복지시설에 대한 설문조사의 경우 응답자가 150명에 불과했지만, 서울대 교표 개선 설문조사는 5천여 명에 달했다. 문항이 5개만 넘어가도 응답률이 많이 떨어진다. 또 경품이 걸려있는지, 주제가 얼마나 관심있는 건지에 따라서도 응답률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쓰는 것만으로 높은 참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여론만 따르면 만사형통? 여론의 측정 방법같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요한 문제들을 오로지 여론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보장하느냐는 것이다. 「뉴스위크」 국제판 편집장 파리드 자카리야는 라는 책에서 광범위한 주민투표제를 도입한 캘리포니아 주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주민(州民)들은 의료보험과 교육 개혁에서 게이들의 권리와 안락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204건의 안건을 처리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잘 작동했을까? 캘리포니아의 공적 영역은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도로도 말 그대로 다 깨져버렸고, 캘리포니아의 교육기관들은 전국에서 최저수준이다. 캘리포니아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이유는 상당 부분이 주민발안의 폐단이 너무나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결과이다. 주민투표의 골자는 지방관들이 세율을 인하하는 동시에 복지는 개선시킬 것을 요구했다. 입법 과정에서 어떠한 토론, 심의나 타협 없이 거세지기만 하는 주민 명령의 눈보라는 법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거나 혹은 상충되게 만들어 버렸다. 왕이 명령으로 통치할 때 정치는 잘 작동되지 않았지만, 국민들이 명령으로 통치할 때도 정치는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정확한 정보 없이 단기적 이익에 따라 의견을 결정하면서 행정 체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는 문제에 대한 심의와 토론, 타협을 통해 찬반 양측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대립된 견해를 수렴하면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과정이 있었지만, 투표가 늘어나면서 모든 것을 세 대결로 해결하게 됐다. 그래서 투표는 증가했는데 정당성은 줄어드는 역설이 나타났다. 여론조사와 투표를 통한 머릿수 싸움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가 확산되고 토론이 심화되는 과정이 있을 때 대중의 참여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세 대결보다 차원 높은 토론을 ‘내 주위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생각하더라.’ ‘내 친구들은 저렇게 말하던데.’ 토론을 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이것으로 여론을 파악할 수는 없다. 실제 여론이 그렇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여론’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강요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수와 관계없이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갖고 토론하며 타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진중권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인터넷을 통한 토론과 논쟁이 처음 선보일 때, 인터넷 논쟁은 수준이 높았다. 예의를 지켰고, 당파적 입장을 가능한 한 인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담론’은 없고 ‘세론’만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거는 없고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이야기들이 대량으로 유포된다. 좋지 않은 일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범인’을 찾고, 좋은 일에는 ‘원인’ 대신 ‘은인’을 찾는다. 청동기 시대 코드다.”(「한겨레21」 622호) 탄핵 이후 서울대에 모처럼 돌아온 논쟁의 계절에, 우리 모두가 곱씹어봐야 할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