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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초 본부 점거 당시 모습.그 동안 교육투쟁은 무엇을 얻었나? |
“교육투쟁이요? 본부 점거하는 식으로 과격하게 나간다고 꼭 뭘 얻었던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본부와의 관계만 악화될 뿐 아닌가요?”‘교육투쟁’을 바라보는 강주원(외교 05) 씨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그는 등록금 인상, 전공진입기준 강화, 학사관리 엄정화 등 교육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과격한 투쟁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본부와 신뢰를 쌓아야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과를 얻어야 해요.”교육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중요한 논점이 됐다. 지난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처음처럼 고고싱’ 선본의 김두현(수의 03) 후보는 “본부를 점거하는 식의 투쟁은 학생과 본부 양측에 상처를 입힐 뿐”이라며 “서로를 파트너로 생각하고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ing’ 선본의 조영태(사회 03) 후보는 그런 생각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지난 수년간 본부와의 대화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 하나 지켜진 게 있었나. 매년 기성회비의 10%를 이월시키면서 신입생 등록금 20% 인상을 말하는 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본부”라고 말한 그는 우리 자신의 요구를 걸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학생회는 과격한 투쟁으로 본부의 신뢰를 잃고, 대화의 여지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학생회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본부의 자세가 학생회를 투쟁으로 내몬 것일까. 학생회와 본부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학생회와 본부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지난 5년간의 기록을 찾아 보았다. 교육투쟁, 승리의 기억은 있는가‘투쟁’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강력한 의지와는 달리, 지난 5년간 교육투쟁이 거둔 성과는 초라하다. 2001년 교육투쟁의 쟁점은 ‘모집단위광역화’였다. 학생회는 광역화 시행 전면 유보를 주장하며 2,333명의 서명을 받고 아크로에서 결의대회를 진행하는 한편 본부에 공개 질의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사회대 단대 및 과 학생회장은 단식투쟁까지 강행했다. 그러나 예정대로 2002년에 광역화가 시행됨으로써 투쟁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002년에는 15%에 이르는 기성회비 인상률과 이기준 당시 총장의 비리가 겹쳐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당시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불신임 총투표’를 시행해 96.1%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이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11일간의 점거 끝에 작성된 본부와의 합의문 9개항 중 실질적으로 이행된 것은 2개 조항에 그쳤다. 이후 오히려 점거를 주도했던 총·부총학생회장, 사무국장, 교육투쟁국장에게 징계가 내려졌고, 학생회는 ‘징계철회투쟁’으로 4달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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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는 총학생회 교육개혁국 산하에 교육투쟁실천단이 꾸려져 등록금 인상 반대, 기성회 이사회 민주화, 학부대학 반대를 주장했다. 교투실천단은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시체놀이 몹’과 같이 새로운 방식의 집회를 시도해 주목을 받았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가깝게는 2006년 4월에 있었던 동맹휴업 총투표가 무산된 바 있다. 총투표 의제는 등록금 인상분 반환, 국립대 법인화 철회, 재수강 제한 철회, 기성회 이사회 의결권 쟁취 등 굵직한 사안들이었지만 20.22%라는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하며 실패했다. 이를 주도했던 교육투쟁특별위원회는 사실상 와해됐다.물론 교육투쟁이 항상 실패만을 거듭한 것은 아니다. 2005년 1월 기성회비 9% 인상 통보를 받은 총학생회는 물리력을 동원해 기성회 이사회를 저지했다. 이를 통해 인상률을 5.6%로 낮출 수 있었다. 또한 같은 해 3월 사회대 학생회는 본부 점거를 통해 수강신청 취소기간 연장을 얻어내는가 하면, 기성회 이사회에서 학생 3명의 발언권을 확보하는 등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교육환경개선협의회(교개협)의 의결권 확보 및 정례화, 학생회의 등록금 책정 과정 참여, 광역화·법인화 철회 등 교육투쟁의 주요 요구 사항들은 관철시키지 못했다.게임의 법칙’은 본부가 정한다그렇다면 총학생회와 본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룬 것은 무엇이 있을까. 현재 학생회가 본부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 채널은 교개협이다. 교개협은 논의할 주제가 생기면 학생회나 본부 어느 쪽이든 소집을 요구할 수 있으며, 본부 측에서는 학생처장을 비롯해 사안에 맞는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교개협 규정에는 회의에서 합의된 ‘주요사항을 이행하도록 한다(제1조)’고 돼있으며, 99년 발족한 이래 몇 가지 합의를 이룬 바 있다.2003년 11월 28일 교개협에서는 재수강 제한 방안이 의제로 다뤄졌다. 본부의 초안은 강경했다. 재수강 가능 학점을 C+ 이하로 제한하는 한편, 재수강시 교수와 면담을 거쳐야 하며 학기당 재수강 과목 수를 제한하고 초수강자에게 수강신청 우선권을 주는 방안이 포함돼 있었다. 총학생회는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2년간의 논의를 거쳐 재수강 가능 학점 제한만 남기고 나머지 방안을 철회시키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2004년 6월 15일에 열린 교개협에서도 본부의 학년별 수강신청 쿼터제 추진에 대해 총학생회는 학번별 홀짝제(현행 방식)라는 대안을 제시, 한 학기간의 논의를 거쳐 2005년 1학기부터 시행할 수 있었다.한편 2002년 총장실 점거라는 홍역을 치른 후 새로 취임한 정운찬 총장은 ‘총장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과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총 세 차례 실시된 대화 중 마지막 2004년 5월 총장과의 대화 자리에서 정 총장은 장애학생지원센터 전문인력 확충, 교직원 성폭력 예방교육 의무화를 약속했고 이는 실현됐다.하지만 대화와 협상의 의제는 대학본부의 정책에 근본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설정될 수 있었다. 학생회의 가장 절실했던 주제는 등록금 문제였지만 교개협에서 이에 대해 합의를 이룬 적은 없다. 2003년 2월에는 아예 ‘등록금 문제는 교개협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04년 1월에 두 차례에 걸쳐 열린 교개협에서도 총학생회는 본부와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한 채 기성회비 인상률을 전혀 변경하지 못했다. 2005년 1월에 역시 교개협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본부 측은 관련 자료를 회의 당일 12시가 돼서야 제공했다. 바로 다음날은 등록금 인상률을 결정하는 기성회 이사회가 예정돼있었다. 총학생회는 본부의 들러리가 될 수 없다며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이어서 3월까지 계속해서 교개협 소집이 요구됐으나 본부가 총학생회가 요구한 구체적 예산내역이나 장학금 개편안, 강의평가제도 등에 대한 자료 제공을 거부해 회의는 결렬됐다. 등록금과 관련해 교개협이 얻어낸 성과는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등록금 인상의 기준으로 삼기로 한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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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총장과의 대화도 쉽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강의평가에 교수·강사의 성폭력에 관한 문항을 추가하겠다는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성폭력 예방교육도 의무화되긴 했지만 ‘성희롱·성폭력 상담소’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여전히 30% 가량이 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있다. 교직원 처우 개선에 사용된 기성회비 인상분을 반환해달라는 요구는 거부됐다. 모집단위 광역화나 서울대 구조조정안 등의 사안 역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투쟁과 대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어쩌면 ‘투쟁’과 ‘대화·타협’을 대립시키는 구도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착시’인지 모른다. 현재 학생회와 본부가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는 유일한 공식 채널인 교개협은 1999년 학생회의 본부 점거를 통해 만들어졌다. 당시 학생회는 ‘학사관리엄정화’에 반대해 대학본부를 점거했다. 점거의 목적이었던 ‘엄정화 철폐’는 실패했고 학사관리는 날로 강화되고 있지만 그 부산물인 교개협이 현재까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투쟁과 대화의 역설’을 잘 보여주고 있다.투쟁의 수위만 높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용 가능한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타협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본부가 설정한 의제 내에서일 뿐이라는 맹점을 갖고 있다. 어떤 방식을 채택할 것인가. 이 질문에만 사로잡혀 있는 동안 막상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