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없었다. ‘2001년 이후 사상 최다 선본 출마’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출발한 제50대 총학생회 선거는 ‘사상 최저 투표율’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결국 무산됐다. 투표 첫날부터 연일 최저 투표율 기록을 경신할 때 이런 결과가 이미 예상되긴 했다. 연장투표를 통해 선거가 성사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섞인 기대도 있었지만, 이틀에 걸쳐 내린 비와 뒤이은 한파는 오르지 않는 투표율에 쐐기를 박았다.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된 것은 2003년 이후 두 번째이다.무관심이 문제다?많은 사람이 학생들의 무관심을 선거 무산의 원인으로 꼽는다. 실제로도 많은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영욱(재료공학 06) 씨는 “특별히 투표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학생회에 크게 관심 없고, 나온 선본들도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 씨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 ###IMG_0### |
| “총학생회 연장투표 마지막 날입니다!” 외쳐보지만 학생들은 무심히 스쳐갈 뿐이다. |
무관심이 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지 관악」 2001년 여름호에 의하면, 95년 사상 처음으로 총학생회 선거 연장투표가 실시됐을 당시 선관위·선본 관계자 등 2백여 명이 모여 회의를 한 끝에 ‘학우들의 무언의 심판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선관위와 모든 선본이 심각하게 반성하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었고, 연장투표는 연례행사가 됐다.2003년 총학 선거가 무산됐을 때도 각 선본들은 학생들의 관심 저조를 이유 중의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은 마련하지 못했다. 단순히 ‘학우들의 무관심이 문제다’라고 말하고 끝내기에는 개운치 않다. 10년째 같은 원인 진단을 반복하고 있을 수는 없다.신뢰 상실이 문제다?조무경(외교 03) 씨도 투표하지 않았다. 조 씨는 “학생회를 뽑는다고 해도 공약이 지켜지는 것도 없지 않나. 선거가 의미 없는 것 같다.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돼도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고 투표 불참 이유를 밝혔다. 학생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학생 사회에 전반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올해에는 특히 황라열 전 총학생회장의 탄핵 사태가 투표율 하락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있다. 이미 투표 시작 전부터 이같은 우려는 총학생회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스누라이프 등을 통해 제기된 바 있다. 김용재(정치 04) 씨는 “큰 기대를 걸고 출범했던 49대 총학이 결과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학생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선거 무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 ###IMG_1### |
| 지난 6월 ‘황라열 총학생회장 사태 관련 진상규명 청문회’를 방청하러 학관 라운지에 운집한 사람들. 사태를 민주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것이 위기를 가져온 것일까. |
2003년 총학 선거 역시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범했던 46대 총학이 선거를 앞두고 분열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 선거 무산의 큰 이유로 지적된 바 있다. 학생들이 “당신들도 똑같은 정치꾼들이었구나”라는 실망감을 갖게 되면서 투표를 거부했다는 것이다.김용재 씨는 “실용적인 공약, 현실성 없는 소위 복지공약만이 강조되면서 신뢰가 사라진 것 같다. ‘운동권’은 자신들의 색깔을 감추고, ‘비권’은 안티라는 정체성만 강조하는 속에서 이렇다 할 쟁점이 없는 밋밋한 선거가 된 것 같다”고 유권자로서 선거를 바라본 소감을 말했다.언론이 문제다?이같은 진단은 선거에 직접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억울할 법도 하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제공된 ‘메뉴’는 매우 다양했기 때문이다.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선본부터 시작해서 운동과 복지 둘 모두를 추구하는 선본, 기존 운동권의 대안 세력임을 자부하는 선본, 일상의 소소한 복지를 중시하는 선본, 교육투쟁을 특화한 선본 등 선택의 폭은 어느 때보다 넓었다. 유심히 살펴본다면 지지할만한 후보를 찾을 수도 있었다.선거 과정에서 나름의 쟁점이 형성될 여지도 있었다. 선거 초반에는 ‘ing’ 선본이 교육투쟁을 쟁점으로 내세우며 다른 선본과 논쟁의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선거 운동이 진행되면서 ‘아크로 집회’와 같은 주제가 부상하고, ‘처음처럼’ 선본이 주장하는 ‘탈정치’가 적절한 대안인가를 두고 공방이 오가면서 ‘권-비권 논쟁’이라는 해묵은 대립이 부상하는 듯 했지만 예전처럼 단순한 구도는 아니었다. ‘ing’ 선본은 사회 운동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학내 사안에 집중하지 않는 기존의 운동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비권으로 분류됐던 2L 선본은 타 선본 후보들을 향해 ‘사랑합니다’라는 자보를 붙여 권-비권 대립 구도를 피해가려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오히려 3개 비권 선본 사이에서 아크로 유세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붙었던 것이다. 각 선본 모두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대립을 단순한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이러한 선거의 쟁점이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데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처음처럼’ 선본의 김두현(수의 03) 후보는 투표 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정보가 제한된 상태에서는 학생들이 판단을 내리는 게 위험하다. 이제까지 학생회에서 있었던 여러 현안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 1차적 책임은 언론에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IMG_2### |
| 11월 14일 1차 유세를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 선본원들이지만, 무관심을 탓할 일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도 유세장을 찾아가는 사람은 열혈 지지자 뿐이다. 유세의 쟁점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언론의 활동은 미미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다. 「대학신문」은 제한된 지면과 발간 주기의 제약으로 순발력 있는 대응을 펼칠 수 없었다. 선거철만 되면 수십 개에 달하는 리플로 풍성한 토론을 이끌어 냈던 「스누나우」는 인력 부족으로 기본적인 기사 업데이트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학기 처음으로 인터넷 속보 제공을 시도한 『서울대저널』은 첫 시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했다. 학내 자치언론이 연합해 발간하는 「선거뉴스」는 투표 전날 저녁에야 배포됐고, 선거 분위기를 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2003년 총학 선거 때도 「선거뉴스」가 발행되지 않았다. 이를 곧바로 무산의 원인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서울대의 언론들이 학생들에게 선거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제도가 문제다?학생 사회의 변화한 현실에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학생들의 무관심’이라는 원인 진단이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형편에서 학생회 활동가들의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학생회에 대한 관심도, 활용 가능한 인력도 줄어드는 현실에서 과거의 제도를 고수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일찍부터 제안됐던 것이 학생회 선거를 3월에 실시하는 방안이다. 3월 선거를 통해 새내기들의 참정권 확보, 민주성을 강화할 수 있고 참여 또한 늘어날 수 있다는 게 주요 명분이다. 하지만 여러 행사가 많은 3월에 선거를 실시하기 여의치 않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3월이라고 투표율이 항상 높은 것도 아니다. 지난 3월의 선거 역시 연장투표를 통해 간신히 성사됐다. 투표 시기 개정안은 지난 전학대회에서 이미 부결된 바 있다.투표율 50% 규정을 삭제하자는 주장도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다. 기성 정치권에는 이런 조항이 없다. 50%를 확보하기 위해 무리하는 것보다, 일단 투표한 학생들의 의사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숙사생자치회 선거에서는 투표율 40%를 넘으면 개표할 수 있게 돼있다. 하지만 낮은 투표율로 당선된 학생회의 대표성과 민주성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고, 이에 대한 개정안 역시 지난 전학대회에서 부결됐다.
| ###IMG_3### |
| 연장투표 마지막날, 총학 선거와 사범대 선거가 같이 진행됐다. 공동 투표소를 설치하면 투표율을 올릴 수 있을까? |
단대 학생회 선거와 총학 선거를 같이 치르는 방안도 생각해볼만 하다. 현재 4가지 지방 자치제 선거를 동시에 치르듯이, 공동 선거일을 지정해 단대 선거와 총학 선거를 한꺼번에 하면 학생들의 관심도 높일 수 있고, 투표함 관리나 인력 확보의 측면에서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문희(철학 04) 선관위원장은 이에 대해 “단대와 총학은 엄연히 구분되는 것인데 공동선거일을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나타냈다.무위로 돌아간 29일간의 노력, 학생회 부흥의 밑거름 되길여러 모로 여건이 좋지 않았던 선거였다. 선관위 예산은 턱없이 부족해, 공동정책자료집도 3백부 밖에 인쇄하지 못했다. 정확한 결산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선관위에 따르면 대략 4백만원 정도의 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선본원이 전반적으로 줄어 인력도 부족했고, 투표기간 초기에는 투표함도 제 때 설치하지 못했다. 선거 홍보 플래카드 게시, 공고문 부착 등의 기본적인 선관위 업무를 수행하기도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다.당선을 목표로 뛰었던 후보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Spotlight’ 선본의 한성실(미학 03) 후보는 “결과적으로 볼 때 학우들에게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올 한해 학생회에서 있었던 혼란과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게 학우들의 회의를 키운 듯하다”며 “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심경을 밝혔다. ‘처음처럼’ 선본의 김두현 후보는 “선거가 무산된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며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학우들의 뜻이다.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자신이 주관했던 선거의 무산을 선언해야 하는 운명을 맞은 이문희 선관위원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 마디 덧붙였다. “가장 많이 수고한 건 각 선본들일 거다. 힘들었던 건 알지만, 그래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거가 무산된 것은 단편적인 공약만이 남발됐던 구태를 벗어나 학생 사회의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우들의 무관심에서만 원인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손쉽게 무관심을 핑계로 삼는 한, 이 ‘10년 묵은 불치병’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해답을 찾긴 쉽지 않아 보인다. 후보 추천부터 선거 무산 공고까지 29일간 학생들과 함께했던 선본들은 어떤 대안을 찾았을까. 앞으로의 일정은 선거 무산을 규정한 학생회칙에 따라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가 소집되고, 내년 3월 경 재선거가 실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선거의 경험이 학생회의 재건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산된 선거라도 ‘헛수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