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저물고 기억은 머물다

동네 어귀에는 ‘멍텅구리 슈퍼’가 있었다.한 눈에 봐도 촌티가 흐르던 그 점방은 전형적인 구멍가게답게 눈과 입을 혹사시키는 형형색색의 군것질 거리들을 갖추고 있었다.100원에 5개를 주던 국화빵과 더불어, 10원 짜리 은박 초콜릿은 나의 단골 메뉴였다.그러니 용돈을 ‘500원씩이나’ 받은 날이면 한없이 마음이 풍요롭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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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귀에는 ‘멍텅구리 슈퍼’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촌티가 흐르던 그 점방은 전형적인 구멍가게답게 눈과 입을 혹사시키는 형형색색의 군것질 거리들을 갖추고 있었다. 100원에 5개를 주던 국화빵과 더불어, 10원 짜리 은박 초콜릿은 나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니 용돈을 ‘500원씩이나’ 받은 날이면 한없이 마음이 풍요롭던 시절이었다. 멀쩡히 잘 다니고 있던 국민학교가 갑자기 초등학교로 탈바꿈하던 무렵, 우리 학교에는 ‘**초등학교’라는 새 명패가 걸렸고 멍텅구리 슈퍼도 무슨무슨 마트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얼마 되지 않아 마트 앞에는 ‘할인’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첨가되었고, 반듯한 네모곽의 스넥류가 이름 모를 불량식품들의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 이 변화의 물결에 당당히 동참하기 위해 엄마에게 새 공책을 사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국민학교’가 쓰여 진 옛날 공책을 갖고는 도저히 공부를 잘 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이 내 구차한 변명이었다. 이 주장은 예상대로 씨도 먹히지 않아, 나는 지우개로 기어코 ‘국민학교’를 박박 지운 공책 표지에 삐뚠 글씨로 ‘초등학교’를 써 넣었다. 이후 나는 분명히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표지 위에 채 지우지 못한 ‘국민학교’의 희미한 흔적들이 수시로 바둥거리는 내 손목을 움켜잡곤 했다. 종종 거창하게도 내 20대 초반을 관통하는 정서가 노스탤지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미 ‘그 곳’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하던 유년기를 넘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문득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떠나온 기억들이 하나하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차창 밖으로 휙휙 무너지는 풍경을, 과거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장면들을 어떻게든 눈 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 어릴 때’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한없이 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나는 줄곧 그 노곤한 추억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프로를 기다리며 흰 페인트로 켜켜이 칠해지는 영화간판처럼 우리 삶도 순간, 또 순간을 아무렇지 않게 떠나보낼 것이다. 그러나 지나가버리는 것,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곧 잊혀지는 것은 몹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리고 잊혀짐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서글픈 일이다. 모질게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나는 해묵은 기억을 자꾸만 들추어낸다. 하나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끔 농담처럼 던지는 ‘잊지 않겠다’는 말은 ‘나를 잊지 말라’는 완곡한 은유이기도 하다. 나 또한 잊혀짐 앞에서 한없이 두렵고 먹먹한 감정을 어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의 잔상과 멍텅구리 슈퍼의 은박 초콜릿이 마음을 자꾸만 나의 마음을 잡아끌듯이, 나 역시 흐릿하게나마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다는 욕심의 발로다. 쉬이 망각을 논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부끄러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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