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우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나

오늘도 전쟁이 시작됐다.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간신히 지하철의 빈 자리에 앉은 K씨는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그렇다고 의식을 완전히 놓아버린 건 아니다.약 30여분의 달콤한 휴식 후 어김없이 들려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에 K씨는 번쩍 눈을 뜬다.“Ball Street Institute.볼스트리트에서는 매일매일 다양한 수업이 제공됩니다.즐기면서 배우는 새로운 영어학원, 볼스트리트 인스티튜트.

오늘도 전쟁이 시작됐다.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간신히 지하철의 빈 자리에 앉은 K씨는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그렇다고 의식을 완전히 놓아버린 건 아니다. 약 30여분의 달콤한 휴식 후 어김없이 들려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에 K씨는 번쩍 눈을 뜬다. “Ball Street Institute. 볼스트리트에서는 매일매일 다양한 수업이 제공됩니다. 즐기면서 배우는 새로운 영어학원, 볼스트리트 인스티튜트. **역 6번 출구에 있습니다” **역에 급히 내린 K씨는 버스로 갈아타고 학교로 향한다. 고급영어 수업의 시사토론 준비를 해오지 않았음을 생각하는 순간, 그의 귓가에는 익숙한 멘트가 들린다. “뉴스는! 뉴스는!” K씨는 자기도 모르게 익어버린 웹주소를 읊조린다. “아, 서울대저널! snujn.com!”: 그렇다. 실로 믿기 어렵겠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21C 파블로프의 놀라운 ‘실험’에 적응해버렸다. 버스·지하철에 광고의 쓰나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 속에 광고의 홍수가 밀려오고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성광고는 우리에게 친숙한 대중교통을 이용, 저렴한 광고비로 높은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광고 시장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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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과 정류장사이에서 안내방송 다음에 나오는 음성광고는 승객에게 무의식중에 광고 내용을 각인시키는 매체다.

버스 음성광고는 정류소를 통과하는 버스 내부에서 12초 간 방송되는 CM광고를 말한다. 서울시는 (주)양진텔레콤에 위성안내방송 기기설치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체 버스 정류소의 10%내에서 광고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버스 음성광고비는 1일 운행횟수(편도)에 따라 다르게 책정된다. 1일 운행횟수가 많은 정류소는 이용인구도 많기 때문에 광고료도 높게 책정된다. 버스 음성광고의 월 이용료는 종로2가, 강남역, 이대입구역, 미아삼거리역 등 번화가가 포함된 SA등급(1일 운행횟수 2500회 이상·85개 정류소 : 120만원)부터 D등급(〃1000회 미만·6750개 정류소 : 50만원)까지 다양하다. 지하철의 경우 서울 메트로에서 3개월 간 2개 열차에 시험 방송을 한 후 2006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음성광고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현재 2호선 12개 역에서 전동차 출발·도착 때 12∼20초짜리 음성광고가 방송되고 있다. 반복적이고 강제적인 음성광고의 효과 대중교통 음성광고가 광고주들에게 인기를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강제적이고 반복적인 광고효과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과 김정오 교수는 “어딘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라 해도 주의의 20%가 남아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리를 듣는다”며 “무의식적으로 반복 청취할 경우 기억에 남기 때문에 음성광고가 효과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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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초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광고주들의 전략은 치밀하다. 대기업의 경우 유명 연예인을 섭외하거나 경쾌한 CM송을 쓰지만, 병원, 한의원, 안경점 등 지역광고의 경우 멘트를 중심으로 광고가 제작된다. 음성광고를 기획하는 양진텔레콤의 이성필 대리는 “전화번호보다는 상호와 그 업체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둔다”는 제작 노하우를 밝혔다. 이 대리는 대중교통 음성광고의 경우 보통 15초인 라디오 광고보다 3초나 짧은 12초 동안에 압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운율을 조율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많은 광고주들이 직접 광고를 기획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컨셉으로 학생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녹두거리 ‘피콜로 안경’의 광고들은, 모두 사장 문정균(37) 씨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2001년부터 버스 음성광고를 이용했다는 문 씨는 광고 내용뿐만 아니라 성우의 목소리 톤, 억양까지 꼼꼼히 고려한다. 게다가 신입생들이 많은 학기 초에는 광고에 상점의 위치까지 추가하는 등의 세심함까지 보이고 있다. 문정균 씨가 밝힌 노하우는 바로 ‘품목별 광고’에 주력하는 것. 타 상점의 경우 상점 자체를 광고하는데 비해 피콜로는 뿔테안경, 하드렌즈 등의 개별 ‘품목’을 광고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구매 실적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 상반기 꾸준히 광고해온 뿔테안경의 경우, 매출이 2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한다. 문 씨는 “광고의 주기 역시 매출에 따라 달라진다”며 4월 중순부터 뿔테안경 매출량이 한풀 꺾이기 시작, 5월이 되니 현저히 낮아지는 것을 보고 다음 광고를 기획중이라고 밝혔다.


CM송에도 철학이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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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광고의 강력함을 예전부터 드러내 온 광고가 있으니 바로 CM송이다. 공중파 TV를 통해 퍼져나가는 CM송 중 일부는 전국적으로 사랑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새우깡’ CM송을 들 수 있는데 최근에는 한국전력의 ‘빛으로 세상을(빛은 사랑)’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누리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오란씨’, ‘새우깡’, ‘롯데껌’ 등 1400여개의 CM송을 지은 작곡가 윤형주(61) 씨는 좋은 CM송을 만들기 위한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윤 씨는 『서울대저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광고주가 제품을 과장되게 광고하기를 원하면 내가 CM송 제작을 거절한다”며 광고는 진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는 광고를 맡으면 “광고할 제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며 인간관계에서의 친근감을 바탕으로 작업해야 좋은 노래가 나온다는 평소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가 작곡한,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라는 가사의 CM송은 한국 광고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최근 인기를 모은 ‘빛으로 세상을’ 역시 한국전력이라는 기업의 좋은 이미지, 가족적이고 친근한 분위기의 영상과 함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CM송에도 법칙이 있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뿔테안경’을 들으면 ‘1000원’을 말하는 서울대생

서울대생 역시 음성광고의 홍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울대저널』이 5월 15일부터 25일까지 서울대생 2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많은 수의 학생들이 음성광고에 자연스럽게 노출돼 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음성광고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설문조사는 키워드를 보고 떠오르는 단어를 즉시 적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피콜로 안경은 정말 싸요. 뿔테 안경이~’라는 키워드에 67%의 학생들이 ‘1000원’이라고 대답했다. 이 뿔테안경 광고는 서울대인들에게 친숙한 공간인 녹두거리의 우리은행 앞을 지날 때면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광고다. “중국, 일본 여행은”이라는 키워드에는 29.6%의 학생들이 ‘하늘땅 여행’이라고 답했다. 최근 줄어든 광고량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치인 셈이다. “대출은~”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5335’의 빈칸을 채우게 한 문항에서는 21.8%의 학생들이 정답인 ‘1544’라고 답했고 40.8%의 학생들이 ‘1588’이라고 답했다. 유사한 다른 광고들로 인해 정답률은 낮아졌지만 설문에 응답하는 학생들은 이 사채광고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반응을 보였다.한편, 설문에 참여한 206명의 학생 중 79명이 음성광고에 대한 다양한 느낌을 말했다. 녹두거리에 있는 셔틀버스 정거장에서 설문에 응한 한 학생은 “음성광고를 재미있게 듣는 편이고 따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응답자들은 ‘익숙하다’, ‘아무 느낌 없다’, ‘불쾌하다’, ‘광고에 따라 다르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는데 57%에 해당하는 45명은 부정적인 느낌(불쾌하다, 짜증난다, 지겹다)을 토로했다.‘뜨거운 감자’가 된 대중교통 음성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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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콜로 안경의 문 사장은 “음성광고를 재미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며 중고등학생들이 광고 멘트를 그대로 외워 장난전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김효정(영어교육 05) 씨 역시 “몇몇 재치있는 음성광고는 재미있게 듣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에선 반복적인 음성광고에 불쾌감을 느끼는 목소리도 높다. 신아름(법학 04)씨는 “원치않는 광고를 무의식적으로 외우게 된 것이 불쾌하다. 몇 번 들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반복되는 광고들은 짜증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올해 초 포털사이트 다음의 누리꾼 토론방 아고라에 제기된 “무분별한 대중교통 광고 좀 줄여주세요”라는 청원에 다수의 누리꾼이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대중교통의 상업적 음성광고에 대한 불만사례가 접수됨에 따라,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이하 부추연)에서는 작년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버스 지하철 광고방송 중단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 YMCA에서도 지난 1월 17일, 지하철 객차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업적 음성광고의 폐지를 목적으로 서울시에 시민감사를 청구한 바 있다. 서울시는 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메트로에 감사를 실시하여, 객차 내 음성상업광고 실시 여부 등을 재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첨단설비 비용을 광고 수익으로 보완할 수밖에 vs 고객의 쾌적성을 보장해야이에 서울메트로 측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하철의 안전시설 투자에 소요되는 비용이 상당했기 때문에 부득이 일부 시설 장비를 기부채납받고 기부채납업자에게 음성광고 대행권을 주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메트로의 관계자는 “음성광고를 폐지하기는 어렵다”며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광고를 하는 등의 방식으로 승객들을 배려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버스 광고를 주관하고 있는 서울시운송사업조합 관계자도 “버스 음성광고는 높은 시설투자비를 메꾸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항변했다. 과거에는 버튼을 누르는 수동 방식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인공위성을 이용, 정류장과 버스에 부착된 송수신기로 정류장을 안내하는 첨단 시스템을 도입, 운영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승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설비 구축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상업적 음성광고 시행은 대중교통의 공익적 목적에 비추어 봤을 때 쉽게 용인하기 어려운 문제다. 게다가 밀폐된 대중교통 내에서의 음성광고는 자막 등의 시각적 광고와는 달리 이용 시민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정취를 강제하고 있어 자칫 상당한 불쾌감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시행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부추연 윤용 상임대표는 “음성광고는 지극히 야만적”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미 요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광고를 ‘강매’하는 것은 이중장사인 셈”이라며 “대중교통의 편의성과 쾌적함을 보장받을 권리”를 강조했다. 대중교통 속 음성광고는 이미 우리에게 일상적인 존재다. 그러나 음성광고의 홍수 속에서 시민 소비자들의 ‘광고 안 들을 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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