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이 2007년 5월에게

올해로 5·18 광주민중항쟁이 27주년을 맞았다.이번 해에는 6월 항쟁 20주년과 맞물려 그 어느 때보다도 5·18을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노력들이 시도됐다.광주에서는 5·18을 재조명하기 위한 국제 학술포럼이 열렸고, 27년 전 그날을 기념하는 전야제에서는 80년 5월을 재현한 퍼레이드가 연출됐다.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앞다퉈 광주로 향했다.

올해로 5·18 광주민중항쟁이 27주년을 맞았다. 이번 해에는 6월 항쟁 20주년과 맞물려 그 어느 때보다도 5·18을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노력들이 시도됐다. 광주에서는 5·18을 재조명하기 위한 국제 학술포럼이 열렸고, 27년 전 그날을 기념하는 전야제에서는 80년 5월을 재현한 퍼레이드가 연출됐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앞다퉈 광주로 향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5월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처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이를 대하는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한편, 80년 5월을 기억하기 위한 학생사회의 발길도 어김없이 광주로 향했다. 『서울대저널』에서는 총학생회가 주축이 된 5·18 서울대인 광주순례단과 함께 5월 19일, 20일 양일간 광주를 다녀왔다.광주의 풍경 #1. 5·18 광주민중항쟁, 그 처절했던 역사의 발자취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암살당한 79년 10·26 사태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서곡이었다. 격변의 시기에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와 구군부 사이에는 군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야기됐고, 이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성공리에 마무리하면서 싱거운 싸움으로 끝나고 만다. 한편, 오랫동안 유신독재에 억눌려 왔던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을 일제히 내기 시작했으며 이는 80년 5월 ‘서울의 봄’으로 꽃피었다.이에 위협을 느낀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맞섰고, ‘서울의 봄’은 힘없이 막을 내렸다. 결국 비상계엄 확대의 불똥이 튄 곳은 반도의 남단 광주였다. 5월 17일부터 광주 시내에 진주하기 시작한 계엄군은 다음날 계엄 해제와 휴교령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곤봉으로 진압했고, 공수부대와 시민들 사이에 유혈충돌이 빚어지면서 사태는 심각성을 더해갔다. 광주 시내 길거리에서 만난 시민 임남희(당시 중1) 씨는 “상상치도 못한 끔찍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공수부대가 한 발 물러서고, 자체적으로 무기를 갖춘 시민군들이 22일 도청광장을 점거하면서 광주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에 의해 움직이는 자치공동체로 탈바꿈한다. 이때의 광주는 ‘해방광주’로 기억되고 있다. 시민 양미영(당시 중2) 씨는 “당시 어머니들이 십시일반으로 주먹밥을 만들어서 시민군들에게 양식을 제공했다”며 “그 당시 군대가 언니 오빠들을 죽고 다치게 하는 장면들을 보며 치를 떨었던 시민들은 하나로 뭉쳐 계엄군에 맞섰다”고 말했다.하지만 해방광주의 기쁨도 잠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27일 광주시내로 진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고 만다. 계엄군은 오후 4시께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했고, 곧 시내 전역을 장악하면서 광주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항쟁 과정에서 숨을 거둔 시민만 150명이 훌쩍 넘었고,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불린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성공을 거둔다.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직접 항쟁에 참여했다는 지역주민 송현수(당시 중3) 씨는 “동기 중 한 명도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다 숨을 거뒀다”며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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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주수호 광주시민 궐기대회의 모습.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기 위해 단결된 자치공동체를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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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용봉캠퍼스 내에 설치된 5·18 기념 조형물. 조각상의 이름은 ‘임을 위한 행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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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전남대 후문에서 열린 5·18 광주순례단 촛불문화제의 한 장면. 5월 광주에는 27년 전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광주의 풍경 #2. 80년 도청 사수 투쟁, 2007년 시청 비정규직 투쟁?

27년 전 그날을 기억하는 광주시내 일대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굵직굵직한 행사가 모두 끝난 19일, 광주시내에는 5·18 민중항쟁 27주년을 기념하는 플래카드들만이 여기저기 나부끼고 있었다. 80년 당시 시민군들의 최후 보루였던 구 전남도청 청사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청사 이전에 따라 현재는 비어 있는 전남도청 인근에서는 ‘아시아 문화전당’을 세우기 위한 준비 작업이 한창이었다.한편, 조용한 도시의 한켠에서는 광주시청과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 사이에 날선 대립이 펼쳐지고 있었다. 20일 광주시청 앞에서는 ‘광주시청 비정규직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 결의대회’라는 이름의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기습적으로 해고한 박광태 광주시장을 규탄하고, 경찰 저지선을 양보받아 시청사 앞마당으로 진입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담은 형형색색의 리본을 다는 행사를 벌였다. 우려했던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물리적 충돌은 다행히도 벌어지지 않았다.기성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광주시는 지난 3월 8일 시청사에서 청소업무를 담당하던 용역업체를 바꾸는 형식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청소원들은 용역업체 소속인 만큼, 시당국에는 그들의 고용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청소원들의 노동조합 활동이 시청 간부들에게 ‘밉보인’ 것이 해고의 이유가 됐다는 것이 해고된 청소노동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청소원들 중 대부분이 고용이 승계된 반면, 노조 활동을 했던 청소원들은 전원 해고됐다.해고된 청소노동자 윤옥주 씨는 전날 촛불문화제에서 “노조에 가입하기 전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휴일수당, 잔업수당 등은 꿈도 꾸지 못했다. 노조 활동을 하며 시청에 강력히 요구한 결과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줄었다”며 “3월 8일에 갑자기 노조원 23명이 전격 해고됐다. 현장에서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버텼는데 오히려 공무원들로부터 폭행죄로 고소당했다. 현장에 없던 공무원이 증인으로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윤 씨는 “5·18 당일 노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묘지 근처에서 7보1배를 진행했는데 수백 명의 사복경찰에 둘러싸여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다. 우리의 요구는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발 일만 하게 해 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광주의 풍경 #3. 각기 다른 5·18을 이야기하고 있지만…20일 찾은 5·18 국립묘지에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동조합과 학생단체, 사회운동단체 차원의 방문이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묘역에는 깃발과 각종 구호들이 가득했다. ‘열사정신 이어받아 비정규직 철폐하자’, ‘혁명정신 계승하여 한미FTA 폐기하자’, ‘오월에서 통일로’……. 5·18 광주순례단에 참가한 인문대 학생회장 려목(서양사 04) 씨는 “광주시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불안정노동을 철폐하는 것이 5월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문원(인문 07) 씨는 “5?18 민중항쟁이 단지 역사 속에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상존해 있는 여러 사회문제와 모순들에 대해 우리가 대처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묘지를 찾은 시민들도 저마다의 염원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방문한 한 시민은 “5?18 당시 우리가 그토록 민주화를 외쳤지만, 27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미성숙한 지점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다른 시민은 “사회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서민들 살림살이도 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5·18 광주민중항쟁이 오늘날에 갖는 함의를 해석하는 방식은 단체들마다, 사람들마다 제각기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5월 광주에서 5·18을 ‘기억하기 위한 투쟁’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외침들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우리 사회의 성숙과 진보를 열망하는 바람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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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노동자 윤옥주 씨는 5월 19일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할 권리를 주는 것이 5·18 정신 계승”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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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광주시청 앞에서 열린 광주시청 비정규직 투쟁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의 장면. 시청 청사에 걸려 있는 ‘광주 고용률 5년만에 최고치 경신’이라는 플래카드가 집회 현장과 대비돼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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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묘지에는 무명열사의 묘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죽어간 열사들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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