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누나우(SNUnow.com)」가 종간했다. 이것이 지금 관악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 사건인지 나는 모른다. 평가는 지금 서울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다만 내가 남기려는 것은 창간 초기부터 2003년말 까지의 「스누나우」에 대한 기록이다.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기억인지도 잘 모르겠다. 글의 쓰임까지 규율하는 것은 필자의 역할이 아닐 테니까.이 기록은 공식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스누나우」에 발을 담갔던 많은 구성원 중 한명의 시각에 불과하다. 그나마 2004년 이후 「스누나우」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빠져있다. 만약 2000년대 초반 관악의 학생 사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할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I. 「스누나우」의 성립 : 패자부활전 혹은 도원결의「스누나우」는 2000년 겨울 탄생했다. 「대학신문」 편집장이었던 신호철 씨, 「학회평론」을 했던 김남훈 씨, 안성호 씨, 그리고 「관악문화」를 만들었던 조충환 씨 등이 함께 새로운 매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준비 모임을 ‘패자부활전’ 혹은 ‘도원결의’라고 불렀다.구상은 각자 달랐다. 아마도 이후까지 「스누나우」 구성원들의 경향을 규정한 두 분파의 대립이 당시부터 존재했던 듯 싶다. 한 편은 문화적 기획/실천 활동과 담론 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매체를 주장했다. 학생회 혹은 학회의 틀을 통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문화적 욕구들을 담아낼 그릇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 편은 서울대 정론지를 주장했다. 서울대의 여론을 선도할 권위있는 매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혹자는 이 두 분파의 대립을 「씨네21」과 「한겨레21」의 충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이들은 두 가지 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과 ‘참여를 확장해 제대로 된 공론장을 만들자’는 것은 「스누나우」를 준비했던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명제였다. 몇 년 동안 관악에서 매체를 만들어왔던 사람들이었으니 메아리 없는 메시지의 공허함을 절감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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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게 닫힌 「스누나우」 편집실. 한때 이 곳에서 살아있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
결과적으로 이들이 합의한 모델은「오마이뉴스」모델이었다. 이들이 애초부터 독자 참여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언론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새로움’과 ‘참여/공론장’이라는 합의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모델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당시로서는 인터넷 언론도 새로운 것이었고, 독자 참여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도 공론장 기능을 수행하는 데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후 외부 언론에 「스누나우」가 소개될 때는 ‘서울대의 오마이뉴스’라는 말로 수식되곤 했다. 2001년 2월 28일, 「스누나우」는 첫 방문자를 받았다.II. 사건길지 않은 역사에 비해 「스누나우」가 겪은 사건들은 적지 않다.1. 만우절 특별판2001년 4월 1일 「스누나우」는 만우절 특집판을 만들었다. 서울대에 있을 법한 일들을 가상 기사[fake news]로 담아내 메인 화면을 구성했다. 요즘 미국에서 한창 뜨고 있는 「데일리쇼(Daily Show)」같은 형식이었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다. 외부 언론들이 「스누나우」를 주목하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다. 1년 뒤 「대학신문」이 「스누나우」를 따라 만우절 특집판을 발행했다. 외부언론은 서울대 학보사가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며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했다. 만우절 특집판의 저작권이 「스누나우」에 있다는 사실을 밝힌 언론사는 없었다. 2. L씨 성폭력 사건, 그리고 댓글 논쟁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인터넷과 대중의 힘에 대한 회의론이 「스누나우」내부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인터넷의 가능성을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사소통의 자유로움, 네티즌의 참여 정치, 공론장. 이런 단어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L씨 사건은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일깨워줬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무책임한 댓글, 사생활 폭로. 몇 년 뒤 한국 사회가 겪게 될 인터넷 문화의 그늘을 「스누나우」는 선체험한 셈이다.L씨 사건은 대자보 한 장에서 시작됐다. 2001년 가을, 반성폭력 학칙에 따라 징계를 받은 L씨가 조사 과정의 강압성, 피해자 중심주의의 자의성, 그리고 관악여성주의모임연대(이하 관악여모)의 조직적 개입을 비판하는 자보를 인문대 벽에 붙인 것이 시발이었다. 무수한 논쟁이 벌어졌다. 「스누나우」의 애초 목표는 논쟁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메아리 없는 논쟁이 지쳐 있던 때였기도 했고,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에 올라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무모하게도 「스누나우」는 익명 토론방을 개설했다. 인터넷과 네티즌을 너무 믿었던 탓이었다.변희재 씨는 초반부터 토론방을 주도했다. L씨의 온라인 변호인을 자임하며 관악여성모임연대를 비판하는 글을 쏟아냈다. 당시 L씨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에게 ‘자백 시한’을 정해주며 사과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댓글을 통해 피해자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기도 했다. 뒤늦게 「스누나우」는 실명 게시판 체제로 바꿨지만 이미 각종 소문들이 오프라인에 퍼져가고 있었다. 사건 당사자들은 법정 공방에 들어갔다.3. 실시간 중계 보도「스누나우」는 학생 사회의 주요 이벤트를 실시간 실황 중계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전체학생대표자대회(전학대회),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 현장 등을 인터넷에 실황 보도 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전학대회 중계 때는 지각·불참자 명단을 보도하기도 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학생 자치 사회의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4. 공연평, 그리고 붕가붕가 중창단, 뺀드뺀드 짠짠초창기의 「스누나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논쟁적인 집단이었다. 공연평도 그랬다. 당시에는 학내 공연을 평론가적 입장에서 비평하는 집단이 전무했다. 학내 공연이란 취미 생활의 연장일 뿐이니 아는 사람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즐기면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스누나우」는 ‘학내 공연도 공연’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자기들끼리 좋으면 그만이라는 학예회 수준의 공연에 대해 비판적인 공연평을 쓰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여러 동아리들과 갈등이 많았다. 댓글을 통해 공연평 필자와 공연자가 논쟁을 벌인 적도 여러 번이었다.「스누나우」는 한편으로 진지하게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서울대 창작곡 모음 음반 ‘뺀드뺀드 짠짠’ 1, 2집이 그 사례이다. 공연 비평은 한계가 있었다. 질이 낮은 공연을 비판할 수는 있었지만, 비평만 가지고 좋은 공연을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가 지지하는 작업이 있다면, 그 결과물을 직접 유통시킬 통로가 필요했다. 그 결과가 ‘뺀드뺀드 짠짠’ 기획이었다. 일정 수준을 넘는 자작곡을 보유한 밴드들과 작업을 시작했고, 그들의 창작곡을 앨범에 실었다. 2002년 초 첫 번째 음반이 나왔고, 2003년에 두 번째 음반이 나왔다. 총학생회와 생활협동조합의 지원을 통해 제작된 이 음반은 오로지 ‘공연’ 뿐이던 유통 채널을 ‘음반’의 형태로 확장시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별로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2006년까지 모두 다섯 장의 음반이 꾸준하게 나오고 있고, 그래도 최소 20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이 음반을 접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스누나우」의 문화관을 요약하는 두 가지 개념은 ‘창작 중심주의’와 ‘아마추어리즘’일 것이다. 실제로 스누나우 구성원들이 직접 공연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붕가붕가 중창단’을 만들어 학내 여러 공연의 오프닝을 담당하기도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아마추어리즘의 실천이었다. ‘뺀드뺀드 짠짠 2집’을 기획했던 스누나우 편집장 고건혁 씨는 이후 총학생회 문화국에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이어갔고, 서울대 사람들을 기반으로 한 인디 레이블 ‘붕가붕가 레코드’를 설립하기도 했다.5. 「격월간 서울대」와 「광합성 페이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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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내 정보를 신속하게 전해주던 「스누나우」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
창간 초기부터 인터넷 매체로서 갖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스누나우」의 일원들은 호시탐탐 오프라인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모색은 2001년 말에 1년 총결산의 형태로 「격월간 서울대」의 창간준비호를 종이 잡지 형태로 발간하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창간준비호로 끝. 인터넷 매체를 꾸리기도 바쁜데 격월로 종이 매체를 별도로 발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꿈이 완전히 꺾이진 않아, 마침 솟아오르고 있던 ‘축제 르네상스’ 흐름에 편승하여 다시금 기회를 노린다. 2003년에 축제 전문 기획집단 ‘축제하는 사람들’(축하사)이 만들어지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축제’라 일컬어지던 서울대의 축제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스누나우는 축하사와 합작, 2003년 봄 축제 공식 신문을 「광합성 페이퍼」라는 제목의 타블로이드 판으로 발간한다. 축제는 대박. 예년 같았으면 텅 비어있을 잔디밭에 새벽까지 사람들이 득시글대며 축제를 즐기는, 나름 감격스러운 광경을 만드는 데 「스누나우」도 일조했다. 광합성 페이퍼는 2004년 봄 축제에도 한 차례 더 발간된다.III. 스누나우와 스누나우의 친구들학내 자치 조직의 역사는 실상 구성원들의 연대기에 가깝다. 조직이 개인을 규율하는 것보다 개인들이 조직을 결정하는 부분이 더 크다. 「스누나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누나우」가 어떤 집단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들이 「스누나우」를 거쳐 갔는지 살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패자부활전앞에서도 창간 멤버들이 「스누나우」를 ‘패자부활전’이라고 불렀다고 썼다.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다른 학내 매체 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호철 씨, 권기봉 씨 등 「대학신문」 내부의 진보적 그룹, 조충환 씨 등의 자치문화 계간지 「관악문화」 그룹, 김남훈 씨, 안성호 씨, 조귀동 씨 등의 「학회평론」 그룹,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발행했던 「그날에서 책 읽기」에 참여했던 이상은 씨 등이 함께 했다. 각자의 매체를 내며 공통적으로 고민했던 것들을 – “이제 아무도 듣지 않는다” – 극복할 새로운 매체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이 「스누나우」였다. 그래서 ‘패자부활전’이었다. 좀 더 솔직한 표현을 쓴 사람에 따르자면 「스누나우」는 학내 매체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살풀이장’이었다.재생산여느 학생 조직들이 그렇듯 「스누나우」의 최대 고민도 조직의 유지였다. 구성원을 받고 교육시키는 것은 항상 절박한 과제였지만, 결과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2002년부터는 서울대에 학부제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자치 활동에 관심을 둘 만한 신입생의 수가 줄어들었다.고학번을 위주로 새 멤버를 충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애초부터 ‘패자부활전’이었지만, 그 성격은 조직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이어졌다. 다른 학내 자치 단위에서 활동하다 실망해서 온 사람, 동아리 활동을 후배들에게 물려준 뒤 심심해서 가입한 사람, 다른 단위에서 「스누나우」와 함께 일을 하면서 양다리를 걸친 사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스누나우」에 들어왔다. 대략적으로 2학년 말에서 3학년 초에 「스누나우」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조직들보다 고학번들이 많은 집단이었다.다행히 신입생들도 모집할 수 있었다. 2002년 상반기 첫 번째 공채를 실시했고, 2학기에도 선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누나우」는 신입생들에게 친화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신입생들을 교육하는 구체적인 커리큘럼도 없었고, 그렇다고 신입생들을 인간적으로 챙겨주는 친절한 선배들도 없었다. 신입생을 떠받들어 주는 분위기도 없었다. 예를 들어 「스누나우」의 독특한 ‘경어 문화’만 봐도 그렇다. 「스누나우」에서는 선후배를 막론하고 경어를 사용했다(친해지면 서로 말을 트기도 했지만). 선배가 후배에게 말을 일방적으로 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거지만, 선배가 후배를 인간적으로 챙겨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몇 명의 신입생들이 끝까지 남아 조직을 재생산 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2003년 공채 기수부터는 체계적 신입생 교육을 시작했다.「스누나우」의 친구들서두에 말했듯이「스누나우」는 「오마이뉴스」를 모델로 시작한 매체였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들로 채워지는 매체가 아니라 독자들이 직접 콘텐츠를 제공하는 웹진을 목표로 했다. 심지어 1년간은 ‘기자’라는 말도 쓰지 않고, ‘편집위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가 그랬듯, 「스누나우」도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기자’들이 쓰는 ‘기사’ 위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학내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판’을 만들자는 기본 구상은 유효했다. 「스누나우」 구성원들은 학내의 여러 집단이나 개인을 발굴해 참여를 유도해서「스누나우」의 지평을 넓히는 노력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들을 ‘스누나우의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초창기 「스누나우」에 만화를 연재했던 만화가 ‘김태’ 씨(「십자군이야기」 작가), 영화평을 정기적으로 실었던 영화 동아리 씨네꼼 출신의 ‘해골’ 씨나 ‘작알’ 씨, 공연평을 쓰면서 알게 된 여러 밴드들(이들 중 다수는 「뺀드뺀드짠짠」에 참여했다), 동아리들이 모두 ‘스누나우의 친구들’이었다. 2002년 부터는 스누나우 전·현직 편집위원과 스누나우의 친구들을 한데 모아 ‘스누나우의 밤’을 개최했다.IV. 「스누나우」의 시대「스누나우」는 ‘새로움’과 ‘참여/공론장’을 화두로 시작한 매체였다. 종간을 즈음해 목적을 달성했는지 자문해 본다. 아쉬운 점이 많다. 인터넷 언론이라는 모델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서울대의 공론장은 「스누라이프」로 자리잡은 것 같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공론’들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후배들은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간 초기부터 종간에 즈음해서까지 스누나우는 창간 목적을 한 번도 달성한 바 없다. 창간 당시의 야심에 비추어 보자면 우리들은 다 같이 실패했다.그러나 「스누나우」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스누나우」가 했던 일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년간의 기간 동안 「스누나우」가 벌였던 일들은 관악의 학생 사회가 진화하는 문턱들이기도 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 합리적인 총학생회 운영, 선거 참여와 50%룰에 대한 논쟁, 보다 활기 찬 축제에 대한 고민. 온전히 「스누나우」 혼자 해낸 일들은 아니지만, 「스누나우」가 그 흐름의 한 가운데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한 것도 사실이다.「스누나우」몰락 또한 학생 사회 전반의 몰락과 함께였다. 「스누나우」는 2000년대 초반을 관통한 어떤 흐름의 진화와 쇠멸을 보여준 상징이었다.이 글을 쓰는 이유도 「스누나우」가 대표했던 그 흐름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스누나우의 시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시간이 좀 더 흘러봐야 알 것 같다. 평가는 후대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