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즐거운 반역이다

지난 2월, 가 15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가 국내에서 인문서로는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 수 있었던 데는 원작의 매력을 생생하게 전해 준 번역도 큰 역할을 했다.매끄러운 번역으로 10여년 간 에 생기를 불어넣은 번역가 김석희 씨.그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으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약 20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지난 2월, 가 15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가 국내에서 인문서로는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 수 있었던 데는 원작의 매력을 생생하게 전해 준 번역도 큰 역할을 했다. 매끄러운 번역으로 10여년 간 에 생기를 불어넣은 번역가 김석희 씨. 그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으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약 20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료를 많이 받는 번역가로 꼽히는 선생은, 1997년에 제 1회 한국번역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바람이 아직은 쌀쌀한 3월의 어느 오후, 홍대 모처에서 번역가 김석희 선생을 만났다. 김석희 선생의 풍부한 감성과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서울대저널』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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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선생님의 대표적인 역서라고 할 수 있을 15권이 완간됐습니다. 간략한 소회를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약 10년 간의 작업이었다. 좋은 필자, 좋은 출판사, 좋은 독자의 인연이 얽혔으니, 번역자로서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다. 이제는 어디 가서 ‘김석희입니다’보다 ‘를 번역한 김석희입니다’라고 하면 금방 알아보니까, 스스로를 편하게 소개할 수 있다. (웃음) 조금 덧붙인다면, 역자 후기에도 썼지만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전선을 누비고 다니다가 전쟁 후에 시골에 정착한 어느 로마 병사의 기분이라고나 할까.처음에 를 번역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95년 초에 한길사에서 연락이 와서 나랑 정도영 씨, 그리고 오정환 씨 세명이 모였다. 는 2권짜리라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정도영 선생이 갖고 갔고, , 은 오정환 선생이 골랐다. 당시 가 3권까지 나온 상태였는데, 내가 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장 젊었기 때문이었다. 15년간 계속 이어질 작업이라고 하니까.(웃음)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이전에 다른 몇몇 출판사에서 시오노 선생의 책을 번역하고자 계획했다가 일본, 여류작가, 도쿄대 역사학 전공이 아닌 아마추어 작가 등이 문제점으로 작용해서 결정을 철회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만 팔자가 있는 게 아니라 책도 팔자가 있는 셈이다. 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인기의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재밌으니까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닐까. 번역할 때 재미없는 책은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게다가 책이 나온 게 정치적 구호로 세계화를 내세웠던 김영삼 정부 때다. 당시 세계화의 선봉에 섰던 것이 바로 재계였는데, 일반 독자보다 재계가 먼저 읽고 추천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또 리더쉽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황제전’ 아닌가. 1980년대만 해도 일본에는 정계를 지배하는 거물 정치인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거품 경제가 위기를 맞고, 그럴듯한 지도자도 나오지 않았기에 지도자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3김 시대가 간 후 카이사르 같은 강한 리더쉽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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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에서 소설로 등단하셨으나 근래에는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번역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연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불문과를 마치고, 국문과로 학사 편입했다가 국문과 대학원을 중도에 그만뒀다. 나중에 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더라. 가르친다는 건 마음을 열어 남에게 나눠주는 일인데 나한텐 그런 기질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 연구를 하려면 남이 쓴 글만 읽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198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등을 통해 80년 이전에 데뷔한 이도 있었는데 난 촌놈이라 그런지 몰라도, 신춘문예로 폼나게 등단해야겠다 싶더라고.(웃음) 서울대 재학 중에는 대학문학상을 받았는데 73년에는 소설로 (당선작 없는) 가작, 74년에는 시 당선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우리 때는 문리대를 나오면 진로가 좁았다. 교직, 언론사, 종합상사(무역회사), 대기업. 아니면 나같은 ‘(전문)업자’가 되는 길.(웃음) 나도 글을 쓰면서 용돈을 벌어야 했다. 불문과를 나와서 원서 읽는 데는 익숙하니까 딱 좋은 아르바이트가 번역이었다. 87년이 나한텐 중요한 해다. 그 때까지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6번이나 낙방했다. 한 2년 쯤 쉬다가 이번에 안되면 꿈을 접는다고 생각하고 신춘문예용 소설 3개를 썼는데, 실천문학에서 재일동포작가인 김석범 선생이 쓴 책을 옮겨보라는 제의를 했다.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라는 책이었다. 주인공들이 제주도 말을 쓰는데, 내가 제주도 출신이다. 번역을 본격적으로 해 보니까 재밌더라. 소설 안 되면 이걸로 먹고 살아야지 싶었다. 그 다음해에 바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한 동안 두 작업을 같이 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창작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먼저 심사하곤 한다. 좀 젊었다면 치기나 오기로 발표할 수도 있겠는데, 어떤 경우는 원고를 고칠게 있노라고 도로 갖고 와서 돌려주지 않은 적도 있다. 그 무렵 를 번역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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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벌이는 안 되지만 폼은 나고, 번역은 나를 먹여 살리는 직업이었다. 를 계기로 창작과 손을 끊고 번역을 주로 했다. 95년 이후는 작품 발표를 딱 한 번 했고, 그 후론 창작과 잠시 결별한 셈이다. 소설 창작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지? 물론 있다. 카메라맨들이 일상의 장면을 프레임으로 보고, 한 번 찍어봐야겠다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처럼 글 쓰는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뭔가 떠오르면 소설로 써먹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메모를 하게 된다. 지금도 그 버릇을 갖고 있다. 언젠가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욕망의 불씨다.(웃음) 기회가 되면 쓸 것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번역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다소 추상적인 질문이기는 하나, 선생님의 번역관에 대해 포괄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원문에 치중하느라 우리말을 훼손하느냐, 원문을 버리고 우리말에 충실해지느냐. 둘 다 살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를 못하니, 어느 한 쪽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문학을 주로 번역하는 나는 기본적으로 책이 독자들에게 편하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종 후배들이 자기가 번역했노라고 갖다 주는 책이 있는데 가끔 문장을 읽다가 원문이 보이는 경우에는 책을 덮어버린다.(웃음)‘번역(飜譯)은 반역(反逆)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게 사실이다. 나는 이 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번역도 기본적으로 글쓰기의 하나인 이상, 번역가의 문체를 벗어나기 힘들다. 번역에도 문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좋은 번역을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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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베스트셀러의 대리번역 문제 등으로 출판계가 한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 출판계의 번역풍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분야에나 사기꾼은 있는데, 번역계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한번 일이 터진 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예리한 독자가 먼저 알아보지 않을까. 번역풍토가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 아쉬운 점이 많다. 대학에서 전문 분야를 연구하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번역에 나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논문은 학술 업적으로 인정하면서 전공 관련 번역서는 인정하지 않으니, 사서 고생할 사람이 없다. 또, 번역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5명 정도 될까? 몇몇 유명한 분들을 빼면 생활이 어렵다. 그렇다고 출판업계도 사정이 빤하니 쉽게 고료 문제를 논하기 어렵다. 결국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안타까운 현실이다. 학창시절,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헤겔과 마르크스의 접점을 찾고자 했던 마르쿠제의 이라는 책이 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동숭동 캠퍼스 앞에 흐르는 개울을 세느 강,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했다.(웃음) 낭만이라면 낭만이다. 그런데 이런 낭만은 문학도로서 ‘일안렌즈’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일안렌즈’적 시각에서 ‘이안렌즈’적 시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꿔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학생들이 읽기에는 아마 그 후속격인 이 다소 쉽게 다가올 것이다. 후배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격려의 말 부탁드립니다. 나는 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니 책을 강조하고 싶다.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은 지나치게 실용서 위주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상상력을 기르기 바란다. 상상력은 앉은 자리에서 뜬 구름 잡듯이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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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찍는 풍경 사진 나까지 꼭 찍을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나만의 컨셉을 갖고 사진을 찍곤 한다. 예컨대 요즘은 나무 껍데기의 균열이나, 바위의 무늬를 클로즈업해서 찍는다. 멀리서는 하나의 구상으로 보이던 것이 렌즈를 가까이대면 추상으로 변하거든. 그게 참 신기하다.” 선생은 50년의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담백한 문학적 감수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좋은 필자, 좋은 출판사, 좋은 독자의 인연 때문에 행복하다는 번역가 김석희 씨.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는 우리 시대에 이렇게 좋은 번역가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담담한 묵향이 물씬 풍기는 그의 글을 앞으로도 계속 읽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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