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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월회(중어중문학과 교수) |
『한비자韓非子』는 유가보다도 먼저 싹 텄던 법가의 사상이 집대성된 결정판이다. 그러나 전통시기 내내 유가가 주류를 점했던 탓에 『한비자韓非子』는 늘 비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로서는 거작이었던 이 책이 별다른 손실 없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1. 전국시대 말엽, 한비자는 문하생들과 함께 점차 무르익어가는 통일의 조짐을 감지하고, 통일제국을 경영하기 위한 방책 마련에 심혈을 쏟는다. 당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 ‘변법變法’이라 불리는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 목적은 부국 강병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 제국의 초대 천자가 되는 것이었다. 선두 주자는 서쪽의 진秦이었다. 중원의 각국으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것이 오히려 변법을 추진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만큼 개혁의 장애가 되는 기존 질서의 두께가 엷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은 중원의 제후국보다 훨씬 빠른 기원전 4세기 경에 내정 개혁을 단행하고, 순식간에 그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게 된다. 이때 발군의 활약을 보인 이가 법가인 상앙이었다. 그는 단 10년 만에 기득권층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군주와 서민을 아우르는 무척 능률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했다. 그리고 그 힘이 고스란히 진시황에게 이어져, 마침내 그의 발 아래 천하가 통일되기에 이른다. 가슴 벅찬 통일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시절, 진시황은 우연히 한비자가 쓴 글을 읽었다. 그러고는 연신 자신의 무릎을 쳐댔다. “이런 이가 내 곁에 있다면, 내 곁에만 있다면!!” 저절로 나오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한비자韓非子』의 최대 장점인 ‘현실에 대한 차가운 직시’, 그가 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통일제국의 경영을 염두에 둔 한비자는 어떠한 이상론이나 도덕론에도 한 눈 팔지 않았다. 대신 통치술을 포함한 정치 양상을 솔직하게 담았다. 나아가 주류였던 유가 지식인들이 직접적으로 입에 담는 것을 애써 피해왔던 각종 정치적 술수도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정치판의 적나라한 횡단면들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 그리고 이의 분석과 진단을 통해 그는 ‘천하 경영’의 방략을 제시했다. 진시황의 마음이 흔들릴 만했다. 그가 보기에 『한비자韓非子』는 통일과 통일 후에, 다시 분열되지 않도록 그들을 진정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방책을 담은 보고였다. 그래서 『한비자韓非子』는 전통시기 내내 많이 읽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유가적 지향을 표방한다 해도, 제국인 한 자신의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실제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2. 『한비자韓非子』를 읽는 즐거움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탕으로 제국 경영의 방책을 명쾌하게 제시했다는 실용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한비자韓非子』가 지식이나 내용보다는 그것을 ‘활용’해먹는 재미를 안겨준다는 점이다.‘법가를 사상가로 볼 수 있어?’라는 회의가 있을 정도로, 한비자는 현실적인, 너무나도 현실적인 지식만으로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했다. 그래서 『한비자韓非子』는 현실에 매우 능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진시황이 『한비자韓非子』에서 찾은 즐거움 역시 서술된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의 포부인 통일제국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렇듯 ‘활용’의 층위에서,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이 유발되는 독서 경험은 흔치 않다. 더구나 중국의 고전 중에 현실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텍스트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한비자韓非子』를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활용’의 층위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한비자의 화술이다. 『한비자韓非子』의 대다수 논의는 기본적으로 임금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유세한다는 상황 아래에서 서술되었다. 임금과 신하는 그 처한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추구하는 바와 이해관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서로 상충된다. 따라서 신하의 주장은 자주 임금의 이익과 대립되며, 그때마다 신하는 임금을 설득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상충되는 이익의 한쪽 당사자를 설득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비자는 명쾌한 논리와 잘 알려진 고사의 적절한 활용 등을 통해 이 지난한 일을 말끔하게 치러낸다. 그 성공률 높은 화술의 실제가 『한비자韓非子』에 풍요롭게 담겨 있다. 혹 변호사나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이 있는가? 『한비자韓非子』의 다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성숙한 시민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한번쯤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저것 따지며 읽는 과정에서 ‘지금-여기’의 정치를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길 것이다. 3. 『한비자韓非子』란 비주류가 주류의 틈새를 헤집고 말쑥하게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정치라는 살아있는 현장에서 쟁취한 값진 대가였다. 그리하여 대대로 담론의 질서와 무관하게 중요한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전을 포함하여 텍스트를 접한다 함의 궁극적 의미와 쏠쏠한 재미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한 나라 차원이 아닌 ‘세계’라는 차원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다. 시들어가는 제후국의 지식인으로 천하 경영을 꿈꿨고, 결국 진시황으로 인해 자신의 포부가 실현된 한비자. 이것이 그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