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평준화, 그랑제꼴을 고려해야
박희은(인문1 06)매달 「서울대저널」을 기대하는 독자중 한 사람으로서 이번 호의 기사들도 흥미롭게 보았다.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소개하는 기사를 통해 특정 언어의 제국주의 현상이나 국제어가 갖춰야 할 평등성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 ‘우리가 만난 사람들’ 코너에서 다룬 비전향장기수 박종린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만났을 때는 내가 학내언론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을 만나게 해주는 「서울대저널」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또한 ‘학벌’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해 다룬 것도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사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안타까움만을 토로하는 데 그쳤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학벌 문제는 워낙 방대해 어려운 사안이기는 하지만 「서울대저널」에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방안을 제안했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큰 틀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특집’학벌을 던지다’의 내용중 ‘평준화된 프랑스의 대학들’ 이라는 기사는 일부분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프랑스의 대학들이 평준화돼 운영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그랑제꼴(Grandes Ecoles)’이라고 통칭되는 엘리트 양성 전문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 시대에 만들어진 국립 토목학교에서부터 시작한 그랑제꼴은 20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프랑스의 걸출한 인재를 배출해왔고 이 곳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선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프랑스를 이끌어 갈 1% 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그랑제꼴이 존재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대학 평준화가 잘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기사에 실린 ‘프랑스의 대학들은 성공적으로 평준화되어 운영되고 있다’ 라는 말은 진실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우수한 엘리트 학생들은 그랑제꼴에 진학하게 되고 그 나머지 학생들은 평준화 돼 있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대학에 지원할 때에 자신의 모든 학업 결과들을 제출해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아야 하며, 분야별로 더 수준 높은 학교라면 그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뽑아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랑제꼴에서 제외된 ‘나머지’ 학생들도 완벽하게 평준화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처음 독자후기를 쓸 때는「서울대저널」을 칭찬하고 기자분들께 감사하려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쓰고 보니 너무 질책한 듯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서울대저널」을 아끼는 마음에서, 더 사랑받는 학내언론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의 표현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저번호 독자후기를 쓰신 이한웅님의 말처럼 나 역시 「서울대저널」이 새로운 대학언론 패러다임의 선두주자가 되길 바란다.독자와 기자간의 생생한 소통이 아쉬워위문희(연세대학교 영문06, 연세춘추 기자)한 권당 120여 페이지가 넘어가고 그 달에 소개되는 이슈들은 열 손가락으로 세도 모자라다. 내용이 알차다고는 생각되지만 읽기에 버겁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많은 키워드들에 대한 피드백을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읽은『서울대저널』에 대한 단상이다. 자치언론이 갖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학내 구성원들에게 양질의 내용을 풍부하게 전달하는 『서울대저널』의 힘이 부럽다. 그러나 최상의 아이템들과 훌륭한 기사를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학내 구성원들의 여론이 이 한 권에 오롯이 담겨 있는지는 의문이다. 가령 연세대학교학보사 「연세춘추」에서는 직접 기사를 쓴 기자와 그 기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가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춘추를 읽고’라는 코너를 마련했다. 연세대학교 연세편집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연세』지 역시 독자가 제보하는 ‘R note’와 이에 기자가 답하는 ‘re note’라는 코너를 마련해 기사 취지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독자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이 언론들이 학내 여론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보다 정확한 기사 전달에 힘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기사라면 분명 독자는 기사를 읽은 후 자기 자신 또는 주변 사람, 나아가 이 기사를 쓴 기자에게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질문을 독자가 안에서 삼키느냐 아니면 밖으로 토해내느냐는 분명 시스템과도 관계가 있다. 『서울대저널』이 아쉬운 까닭은 바로 독자와 기자간의 생생한 의사소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기자와 독자 간에 쌍방향 의사소통이 없다면 기사를 쓰는 취지가 무색해지고 만다. 기자는 기사를 통해 정보를 순환시키고 여론이 소통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보전달에 그치지 않고 학내 구성원들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보다 진일보한 『서울대저널』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