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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에 ‘머리부터 들여놓기 기법(Face-in-the-door technique)’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어린 아이들이 엄마에게 우선 비싼 물건을 사 달라고 떼를 쓰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것보다 좀 더 싼 것을 사 달라고 하는 식으로 들어주기 힘든 무리한 부탁을 먼저 해서 상대가 거절하면 그보다 더 작은 요구를 제시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다들 어린 시절에 비싼 장난감 세트를 사 달라고 부모님께 졸랐다가 혼이 나고 작은 장난감 하나 정도로 목표치를 낮춰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올해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대학 본부가 보여준 일련의 태도에서도 이런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지난 해 12월 말경에 대학 본부는 신입생 19%, 재학생 9% 인상을 뼈대로 하는 등록금 인상 계획을 언론에 슬쩍 흘렸다. (12월 23일자 「매일경제」, “서울대 신입생등록금 최고 19%까지 인상 검토”) 정원 감축으로 인한 등록금 수입 감소분 보충이 주요한 근거였다. 시기가 방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대학 본부는 부랴부랴 “검토안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며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학 본부는 등록금 평균 13.7% 인상을 전제로 한 예산안을 교육환경개선협의회에 공개하며 등록금 인상을 압박하다가 1월 22일 신입생 12.8%, 재학생 5.4% 인상을 골자로 한 등록금 인상안을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이는 평균 7.5%의 인상률을 적용한 것으로, 본부는 더 이상의 추가 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물론 이후에도 등록금 인상 반대 여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등록금 20% 인상’이 줬던 충격이 너무나 컸던지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나마 다행이군’ 하는 안도의 한숨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냉철히 따져 보자. 학생들은 ‘계획보다 5~7% 인하된 등록금’을 부담하게 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더욱 더 큰 부담을 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공계 신입생들이 3백만원이 넘는 가히 역사적이라 할 만한 등록금 고지서를 받게 됐으며, 인문사회계 신입생들도 250만원을 훌쩍 뛰어 넘는 등록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재학생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대학 본부의 기만적인 숫자놀음 앞에 학생들의 부담만 가중된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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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머리부터 들여놓기 기법’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일종의 착시현상에 빠지게 만들어 협상을 용이하게 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국가 간 맺어지는 통상협정이나 기업 간 체결되는 중요한 계약들이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처음부터 제시한 조건대로 체결되는 협상은 없기 때문에, 대학 본부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전제를 깔고 초반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본부의 발표에는 ‘세일즈맨의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한테 떼 써봤자 밑져야 본전이고, 기업 간의 계약이야 조건이 안 맞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만, 대학 본부는?치졸한 숫자놀음으로 학생들을 현혹하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범하고야 말았다. 바로 학생들과의 신뢰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이다.??대학 본부가 갑작스레 방침을 바꿔 평균 7.5% 인상 방안으로 후퇴하며 “긴축재정과 적자예산 편성을 감안한 것”이라고 밝힌 점은 스스로 그동안의 경영이 방만했음을 고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등록금 인상 역시 ‘일단 올려놓고 보자’는 식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뿐만 아니다. 본부는 기성회 이사회의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가책정한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통보해 학생들을 또 한 번 경악케 했으며, 국가로부터 교육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에는 손을 놓은 채 ‘예산 타령’만 하고 있다. 교육에서 ‘공공성’의 가치가 협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등록금 문제를 둘러싸고 대학 측과 학생들이 타협점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협상 아닌 협상’이 이뤄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자 사이에 심각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협상’이 이뤄지기 힘들다. 대학 측은 막강한 정보력과 일방적인 의사결정권을 무기로 학생을 압박할 수 있지만, 교육의 주체로 당당하게 대우받아야 할 학생들은 한낱 ‘교육’이라는 상품의 소비자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 속에 본부와 학생사회 사이의 불신의 벽은 점점 더 높아만 지고 있는 가운데, 최소한 양자가 상호신뢰에 입각한 대등한 지위에서 제대로 된 협상만이라도 펼쳐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