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장밋빛 꿈은 깨어진 지 오래
농발게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나를 잊었나요”
다시 출발선에 서다

농발게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나를 잊었나요”

새만금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서울에서 김제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김제에서 부안 시내로 들어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계화도로 이동했다.새만금의 길목, 낯선 마을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검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바싹 말라붙어 있는 게의 주검이었다.계화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섬이었으나 동진강 하구 간척사업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 시절 육지로 이어졌다.

새만금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서울에서 김제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김제에서 부안 시내로 들어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계화도로 이동했다. 새만금의 길목, 낯선 마을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검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바싹 말라붙어 있는 게의 주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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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섬이었으나 동진강 하구 간척사업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 시절 육지로 이어졌다. 계화도에서는 백합을 생합이라고 부르며, 지역민들은 생합만 잡아도 연간 2천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계화도에는 오로지 생합만 잡는 사람이 약 400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이제 할머니들이 무릎팍에 손자를 앉히고 들려줄 ‘옛날 옛적에’ 에나 나올 법한 것들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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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는 새만금 반대 사업과 관련해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갯벌배움터 그레’ 는 갯벌생명이 죽어갈 때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갯벌배움터를 운영하는 고은식 씨는 “백합 이외에 살아 남은 갯벌생명체가 없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복원이 늦어진다”며 제 4호 방조제를 3km만 터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그레’ 운영은 지역공동체를 지키는 쪽으로 나갈 것이라고 한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계화도 사람들 사이에서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절박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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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선착장에 어선들이 정박해있다. 계화도 선주회 사무실에 있던 한 아주머니는 “농촌공사에서 구정 이후에 방조제 안의 물을 방류하지 않아 그레질 하는 사람들은 하릴없이 손을 놓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어선을 소유한 어민들 역시 기름값도 안되는 수익이라며 씁쓸해하고 있었다. 새만금 곳곳에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예전에는 갯벌에서 생합을 거두기 바빴던 주민들은 이제 썩은 조개를 거두고 농촌공사에서 일당을 받는다. 계화중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무기력하다고 전했다. ” 1991년 새만금 사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16년동안 보상은 단 한 차례, 1993년도에 이루어진 것이 전부”라며 제대로 된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새만금 사업에 따른 보상금은 개인당 6백만원 정도였다. 최고의 그레질꾼으로 평가받은 사람도 1천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았을 뿐이다. 갯벌에 나가면 하루에 10만원은 벌 수 있었던 어민들에게 평생의 일터를 빼앗긴 것 치고는 턱없이 작은 액수였다. 신형순 할머니는 ” 박정희 시절 계화도 매립할 때는 보상을 받아야 하는줄도 몰랐다”며 새만금 사업은 앞으로 수십년이 더 걸릴테니 추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된 여성 어민들 중에는 시름시름 앓게 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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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야 약자니깐, 힘이 없으니깐.. 위에서 해야 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거지 뭐. 우리야 갯벌 못나가면 손해보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이득이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거지”김숙희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갯벌에 나가신다고 한다. 애초에 전북도민의 표심을 위해 출발한 사업은 어느새 ‘국익’ 이라는 애매모호한 목적을 가진 괴물로 둔갑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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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에서 부안갯벌, 해창갯벌을 지나 방조제 위로 기자 일행을 실어준 택시 기사 아저씨는 본인이 계화도 토박이라며, 정작 보상은 본토박이 사람들 대신 부안 시내 사람들이 받았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서류상으로 양식장, 공장을 하는 사람들은 몇억씩 보상을 받기도 했다고. ” 아무리 관광단지를 만든다, 농지를 만든다 해도 대체 어느 세월에 그걸 만들겠어요? 새만금 때문에 부안은 살기가 많이 어려워졌죠” 바싹 말라버린 한줌의 갯벌 위에 장승과 솟대만이 겨울바람을 받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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