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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미국 번영의 상징이자,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 이야기의 무대가 되어 왔던, 단연코 세계 최대의 도시이다. 오 헨리가 주옥같은 단편소설들로 이 도시를 담아냈다면, 하나같이 독특한 시각이 투영된 영화를 통해 고집스럽게 뉴욕의 이면을 들춰온 감독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마틴 스콜세지는 상당히 미국적인 감독임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 보기 드문 감독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적이라는 말은 그의 영화가 언제나 미국의 이미지를 포착해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미국의 영화적 토양이라 할 수 있는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도 독창적으로 예술성을 추구한다는 데에 스콜세지 감독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습 부진아처럼 세상과 늘상 불협화음만 빚어내며 마음속에는 몰래 적의와 불신을 키워가고 있다. 비교적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는 폴(그리핀 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꽉 짜인 나인 투 파이브의 판에 박힌 일상을 참아가며 일탈을 꿈꾸기는 마찬가지다. 어김없이 무료했던 오늘을 뒤로한 채 카페에 들른 폴. 건너편 테이블에서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마시(로잔나 아퀘트)에게 폴은 호감을 느끼고 결국 번호를 얻어 내는데 성공한다. 짜릿한 밤을 보내고자 하는 기대감으로 충만한 그는 마시가 살고 있는 소호로 향하는 택시를 타지만 거칠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택시기사에게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마시의 다락방에 변덕스러운 그녀는 없고 오직 그녀와 함께 일하는 낯선 여자만이 그를 계속해서 궤변으로 농락할 뿐이다. 지친 폴은 다락방을 나섰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지하철 요금이 90센트에서 1달러 50센트로 올라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감한 상황. 무법천지의 밤의 도시에서 발이 묶인 폴은 과연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성적인 유희를 꿈꾸는 주인공이 겪는 황당한 에피소드들의 연속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모두 하고 있습니까(1994)’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케시의 영화가 다소 지능이 모자라는 듯 한 등장인물들이 억지스러운 상황극을 꾸려나가는 유치한 코미디의 틀을 벗지 못하는데 반해,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정상적이진 않지만 절대로 어리석지 않다. 그들의 위선적인 캐릭터는 미국인을, 나아가서는 다중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인간’을 도해시켜 구현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매번 주인공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통해 인간성의 이면에 담겨있는 횡포와 잔인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부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사실 이 영화의 플롯 전개는 결코 관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 라는 점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만큼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점묘화를 그려내듯이 차곡차곡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통찰하는 영화 스타일만은 단연코 압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자화된 개인에게 냉혹하리만치 무심한 도시에서 밤새 몸서리치도록 액땜을 한 폴이 쓰레기차에 실려 출근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 버려지는 농담 섞인 마지막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스콜세지 감독이 중간에 나이트클럽에서 조명을 들고 있는 장면을 잘 살펴보기 위해서 이 영화는 꼭 봐야 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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