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파트에서는 우리에게 멀지 않은 1900년대, 즉 근현대사에 있어서의 인식 차이를 파헤쳐본다. 2003년 동북공정 등의 이슈로 한참 부각되었던 한중 고대사에 비해서, 한중간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대부분이다. 이번 Diary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각 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짚어보고, 두 나라 사이의 공통적인 대사건들을 Point로 잡아서 중국인 VS 한국인 대학생과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1910.8.22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대한제국은 정식으로 일본과 합방조약을 맺었다. 이는 한국인 모두의 마음에 ‘경술국치’로 뼈아프게 자리 잡았으며, 장장 35년여 간의 일제 통치가 시작된다. 이 35년 남짓한 기간동안, 한국인들은 각각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다른 길을 택했다. 어떤 이는 일본인이 되기를 택했으며, 어떤 이는 죽음을 택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끝까지 이승에 남아서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젊음을, 평생을 바쳤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있고, 인구에 회자되는 그 이름들. 바로 ‘항일독립투사’. 그들은 각자 다른 사상과 다른 방식을 가지고 운동했지만 그들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오직 독립이었고, 끝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항일 운동 중 가장 대규모의 범민족적인 운동은 바로 3.1운동이었다.1919.3.1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1911.10.102천년이 넘게 지속되던 전제군주제여 안녕”청조 말, 사천에서 일어난 폭동을 토벌하기 위해 호북신군을 동원하자, 분노한 혁명파는 10월 10일 무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하였다. 이 봉기의 영향은 전국으로 퍼져 11월 하순, 전국의 여러 성들이 정부에 대항해 독립하며 청조는 와해된다. 그러나 혁명의 성과가 혁명파가 아닌 원세개에게 넘어가면서 이 혁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4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지게 된다.1912.1.1“중화민국의 원년이 시작되었다.”신해혁명 직후, 1911년 말 각 성의 대표들이 난징에 모여 쑨원을 중화민국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성립이 선포된다. 당시 발표된 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 헌법이다.1919.5.4“우리는 베이징의 슈에셩 (學生)”Point强- 일제시대 반제국주의 운동, 그 영향관계는?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은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다. 같은 해인 1919년에 일어난 두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 교과서는 3.1운동이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베이징대학교 학생의 39.9%, 서울대학교 학생의 75.3%가 ‘영향을 주었다’고 대답해, 두 학교 학생들 간의 인식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의 32.3%가 ‘(별로 혹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대답했으며 게다가 아예 들어본 적 없다고 대답한 학생도 38%나 됐다. 반면 서울대학교 학생의 경우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베이징대학교 리안샨(국제관계학) 교수 역시 “두 운동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긴 했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운동”이라며 3.1운동은 식민지 하에서 일어난 준비된 운동이었지만, 5.4운동은 파리 회의 때 몇몇 매국노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터져서 일어난 즉흥적인 운동이라서 서로 어떤 영향을 받은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의 유용태(역사교육) 교수는 “분명히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며 “3.1운동과 5.4운동 사이의 영향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의 언론에서 ‘중국의 몇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소국 조선의 민중들도 일제 통치에 항거해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중국은 무얼 하는 것이냐’ 는 식의 각성을 요구하는 글들이 많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 교수 역시 “3.1운동이 없었다면 5.4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며 3.1운동은 5.4운동의 수많은 유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3.1운동에 수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3.1운동의 대내적, 대외적 효과에 대해 설명해놓은 교과서로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으로서는 이런 의견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일제에 항거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붙인’ 위대한 3.1운동이 5.4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는 들어본 적 없는 이도 있다니. 그러나 중국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과 달리 3.1운동이 귀퉁이에 살짝 언급되는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음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국 학생들이 중국에서 일어나 ‘세상을 바꾸었다는’ 문화대혁명의 정확한 시기나 의의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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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기념하는 조각. 3.1운동은 과연 5.4운동에 영향을 주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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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봉오동전투
“청산리 독립전쟁의 개시”
1920년 8월 청산리대첩
“백운평, 천수평, 마록구에서 스트라이크!”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심한 검열과 고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저 먼 곳, 타향에서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바로 간도, 연해주 등 현재 중국의 동북쪽 영토였다. 이곳은 20년대에 활발했던 항일운동의 주무대가 됐다. 1930년 이후로는 국내외에서 사상과 이념을 달리한 운동가들의 화합 노력이 이루어졌고, 그리하여 일제 무력 통치의 극점에 달한 이 때에 오히려 독립운동은 정점에 이르렀다. 대망의 1945년, 일제는 자신들이 그토록 꿈꿔왔던 ‘제국’에 의해서 패망했다. 당시 조선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꺼림칙함을 안고 독립을 ‘하사’받았다.1945.8.15 대한민국 독립“대한독립만세” 그렇게 독립이 이루어진 후에도 조선은 온전한 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의 미래는 열강들의 회의에서 몇 번씩 토론 주제로 떠올랐고, 그들의 언급에 의해 미래가 결정됐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조선이 아닌 그들의 관점으로 조선을 반으로 나누고 조선은 얼마 있지 않아서 두 동강났다. 결국 이승만이라는 최고지도자는 두 동강난 조선을 인정하는 ‘정읍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50년. 드디어 동족상잔이 일어났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성립 “적색 중국이 시작되었다” 1919년 10월 10일 쑨원에 의해 국민당이 설립되었고, 바로 2년 후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도자 마잉, 마오쩌둥 등을 포함한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려 중국공산당 성립이 선언됐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국공합작을 실현, 북벌을 준비했다.1926년~1928년 국민혁명군의‘북벌전쟁’ “군벌 토벌”1927~1937 제 1차 국공내전“두개의 중국”1928년 10월 북벌의 완성으로 남경을 수도로 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되어 ‘남경시대(南京時代 : 1928∼1937)’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고 이에 중국의 20년대 후반은 내전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1927년 장제스의 공산당 무력 탄압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90%에 달하는 역량의 손실을 입었으나 이에 붕괴되지 않았으며, 국민당에 대한 투쟁을 전개했다. 1937~1945 항일전쟁“몰아내라, 일본제국”1931년 만주사변, 1936년 서안사변 이후 계속된 일본의 중국 침략은 1937년 7월 7일 절정에 이른다. 중국의 동북을 점령한 후 허베이로 진격한 일본 침략군은 베이징 부근에서 전면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의 군대도 강력한 저항을 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했다.1949.10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중국”Point强-6.25전쟁, 혹은 抗美援助(항미원조) 한국전쟁 사안에 있어서는 한국학생과 중국학생의 인식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쟁의 발발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나라를 묻는 질문에 서울대 학생들은 소련(36.5%), 미국(29.3%), 북한(27.6%)순으로 대답한 데 반해, 베이징대 학생들은 미국(43.4%), 북한(26%), 소련(17.8%)순으로 답했다. 설문 결과 원인이 되었다고 지목된 상위 3국은 같았지만, 그 순서 차이는 아직도 각국의 이념이 미국과 소련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한국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배워왔던 ‘통일을 거의 앞두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려 내려와서 우리는 분단되었다’는 ‘억울한’ 사실에 대해서 중국 학생들은 어떻게 배워왔을까? 중공군의 참전 이유에 대한 질문에, 77.2%의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한국에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즉 중국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참전했다는 답변을 했지만, 베이징대학생의 경우 단지 1.7% 만이 이렇게 대답했고 %는 ‘’라고 답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견이 갈렸는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경우 무려 54.5%가 ‘내부 갈등을 조장, 심화시켰다’고 답한 반면 베이징대학교 학생들은 42%가 ‘미국의 침입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고 답했다. 중국이 자신들이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6.25를 부르는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해서 (한국을) 돕다)’라는 명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의 리 교수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이 중국 해안지방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이 압록강 이북의 중국영토를 침략한 미국 때문에 참전을 결심한 것”이라며 당시 미국은 단순히 한국을 원조하며 북으로 진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국경을 넘어 민간인에게 세균폭탄을 터뜨리는 등 중국의 참전을 유도했다고 강조했다. 즉, 꼭 한국전쟁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한번쯤은 터져야 할 필연적인 충돌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유용태 교수 역시 중공군이 참전한 가장 큰 목적은 ‘자국방어’라며 “미군이 압록강까지 쳐들어와서 만주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리 차단한 것”이라 말한다. 영토 바깥에서 전쟁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최선의 방어책이고, 이에 따라 중공군은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석사생 시에쯔하이(국제정치) 씨는 소련이 미국과의 정면충돌에 의해 전쟁이 심화되기를 원치 않아 중국을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로 만들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한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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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은 매서운 겨울 1.4후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어째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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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한반도 땅덩어리 뿐 아니라 한국인 전부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50년대 내내 전후복구사업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식량이나 물자를 미국에서 원조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독재정권 하의 암흑기가 무려 30년 여간 지속된다. 이에 대항한 민중들의 민주화 움직임도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1960.4.19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1979.6.10 민주항쟁중국에서는 마오저뚱 주도 하에 66년 극좌 사회주의 대중운동인 문화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홍위병이 천안문 광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니만큼 국가 주석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주석의 의지대로 모든 사업이 진행됐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역시 주석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일어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천안문 사태이다.1976.4.5 마오저뚱에 반대하는 1차 천안문 사태1989.6.4 계엄부대가 천안문 광장 무력진압 2차 천안문 사태Point中 -민주주의 in 韓中 ‘사회주의 체제에 반발하는 부패한 부르주아 계급이 외국의 지지를 얻어 일어난 광적인 반동운동.’ 이 한 문장이 어떤 운동을 설명하는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중국 정부가 천안문 사태를 보는 시각이다. 천안문사태는 중국의 베이징 대학과 베이징 사범대학 학생들이 노동자, 지식인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이에 당시 중국당국은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계엄을 선포, 6월 3일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로 시민들을 해산시킨다. 이런 시나리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그렇다. 한국 역시 ‘학생’ 위주로 시작해서 ‘무차별 발포’로 끝난 여러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과거에 일어난 비슷한 성격의 사건에 대한 양국의 평가가 심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추앙’되었을만한 이 사건은 21세기의 중국에서 ‘금기’로 남아있다. 베이징 대학교 인사이더 측에서는 “학자를 비롯한 중국 사람들은 천안문사태에 대해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정부 측에서 ‘공표’한 사실만 말할 수 있다”며 심지어 자유파 학자들조차 한국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정도로 자유롭게 비판을 못한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이 통제되어 있는 상태다. 지난 1월에는 인터넷 기업Google이 google.cn을 중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조건으로 ‘천안문사태’ 등의 주제어 검색을 제한키로 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WTO 가입 후 엄청난 외자 유치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중국, 베이징에는 수많은 현대식 고층빌딩에 들어섰지만, 천안문 광장의 혈흔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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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사태. 중국 정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으며, 이 운동은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광적인 반동운동’으로 규정되어 있다. |
Point弱-1992 한중수교
현재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중국 여행을 할 수 있고, 거리에서는 쉽게 중국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불과 15년 전만 해도 공식적인 교류가 불가능했다.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로 교류가 단절된 후 1992년에야 겨우 재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사이 기간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특수했던 40년이다. 이 40년은 세계 질서 상으로 냉전 시기라고는 하나, 중국은 이미 79년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펼쳐 미국을 비롯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어느 나라보다 가까웠던 한국은 왜 이 때 수교를 맺지 못했을까. 유 교수는 “중공군 참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기억과 계속되는 북한과의 대치, 당시 6.25 에 참전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수교에 국내의 합의가 모아지기는 어려웠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87년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사회적으로도 유연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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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수교 이후 14년이 지났다. 양국 교역액은 1,000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고, 매일 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하는 등 상호 교류가 급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