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세계화 시대다. 내가 입고 있는 나일론 옷은 중동 어딘가의 사막 깊숙이에서 끌어올려진 석유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지금 밖으로 나가 이태원이나 안산 거리를 거닐면 코크고 눈파란 외국인이든 얼굴색 가무잡잡한 외국인이든 쉽게 볼 수 있을 터다. 80일이 뭔가, 몇 십 시간이면 지구 한 바퀴도 돌 수 있다. 해외여행 가서 기념품으로 한국 물건을 사오는 해프닝도 바로 ‘세계화 시대’이기에 가능하다.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세계 관련 보도를 보고 듣는 것도 이미 익숙한 일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미국이 이란에 대한 핵 공격을 계획하고 있고, 네팔에선 보안군이 국왕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는 이런저런 사실들을 알려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와 ‘세계’와의 의사‘소통’은 매우 불완전하다. 나는 세계의 ‘이미 일어난’, ‘유명한’ 소식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나를 알기 어렵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통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지만, 국제 뉴스를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국내 뉴스에서보다 더하다. 분별없이 골프 친 총리를 분노와 비판으로 끌어내리는 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국내의 이야기다. 그러나 미 대통령이 더 분별없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파생된 분노는 더 크다 하더라도 그걸로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힘들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큰 맘 먹고 전세계적인 연대를 하지 않는 한 – 한다 해도 제한은 있으나 – 다른 나라의 그들은 역시 타국인인 나의 의견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장벽은 의외로, 혹은 역시나 강력하다. 이것은 정치 결정이나 사건 발생 등 한 나라 내부 사정으로 취급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발생하는 일에도 해당된다. 독도 문제를 보자. 작년 다케시마의 날 제정 당시 한국에서 수많은 뉴스가 생산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흥분했고, 학자들은 우리땅 논거를 펼치고 대통령이 글까지 썼지만 그다지 변화하는건 없었다. 여전히 다수 일본 사람들은 다케시마가 뭔지도 몰랐고, 시마네현에선 이번 해에는 ‘다케시마의 날 1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다음해에는 2주년 기념을 할 것 같다. 동북공정에 있어서도, 또 다른 많은 사안에 있어서도 이 양상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 쏟아지는 언론 보도와 학술 발표, 인터뷰, 담화/성명 발표들의 대다수는 내부의 만족을 제공하나 정작 소통해야 할 대상에게는 닿지 않는 ‘허공에의 외침’이 되고 만다. 소통을 좀 시도하려 해도 사안의 신비한 성격 – 학계에 가면 정치적인 사안이 되고 정치계에 가면 학문적인 사안이 되어버리는 – 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용기를 내어 가끔씩 ‘윗사람’들이 만나 면대면 소통을 해보지만 ‘정치/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단어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돌려쓰다 결국 자기 말만 하고 만다. 나라 간 논의 결과의 절반 이상은 논의 내용이 아니라 두 나라 힘의 위상이 좌우하는 거라지만 이 광경은 좀 많이 답답해 보인다. 제대로 된 소통이 있어야 결론이 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든,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고 있든 자존심과 아집을 버리고 탁 터놓고 소통하는 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연애도. 대화만 잘 하면 풀릴 수 있다는데, 하물며 국제관계에 있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