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가 민주화되면 초대할게요

photo1 지난 축제 기간, 학생잔디에서는 ‘세계민속음식축제’가 열렸다.‘버마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부스아래 능란하게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마우마우소(Maung Maung Soe) 씨.32살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한 번, 그의 유창한 한국어에 한 번 더 놀란다.작년부터 미얀마 장터를 열어왔다는 그는 작년수익금 100달러 모두 미얀마-태국 국경 난민촌 학교에 기부했다.

photo1 지난 축제 기간, 학생잔디에서는 ‘세계민속음식축제’가 열렸다. ‘버마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부스아래 능란하게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마우마우소(Maung Maung Soe) 씨. 32살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한 번, 그의 유창한 한국어에 한 번 더 놀란다. 작년부터 미얀마 장터를 열어왔다는 그는 작년수익금 100달러 모두 미얀마-태국 국경 난민촌 학교에 기부했다. 이번엔 각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400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10년 전, 대학에 진학할 경우 민주화운동을 할 것을 염려한 아버지께서 그를 한국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기 원했다고. 2004년까지 공장에서 일하던 그가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성공회대 박은홍 교수 덕분이었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자신의 추천서가 있으면 언어교육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언어교육원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한국어 선생님 덕분에 2학기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졸업한 그는 언어교육원 연구반에 들어가 한국어 강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도 있고, 미얀마에 돌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도 있거든요.” 그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해서, 기회가 된다면 한국어-미얀마어 사전을 만들고 싶다고 쑥스럽게 말했다. 그는 1999년 ‘NLD 한국지부’의 창설멤버이기도 하다. 한국에 사는 미얀마 사람들은 2,500명 남짓. 그 중 약 20명 만이 같이 활동을 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6년 이후 한 번도 가족을 보지 못한 그는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저도 사람이에요”라며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NLD 해외지부에 비해 한국지부는 규모가 작고 환경이 열악하지만 가장 활동이 활발한 지역 중 하나라며 그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매달 두 번 미얀마 대사관 앞 독재정권반대 시위를 비롯한 각종 활동들로 한국사회에서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기쁘다고도 한다. 현재 그는 난민신청과 관련한 법무부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판결 때문에 초조할 법도 한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희는 사실 난민 인정을 받든 안 받든 상관이 없어요. 난민 신청으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는 민주화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가 통역을 할 수도 있고,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미얀마에는 엄청 아름다운 곳이 많거든요.” 미얀마가 민주화되면 기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그의 눈이 희망으로 빛난다.*미얀마라는 국가명은 군부정권이 바꾼 것으로 민주화 운동가들은 버마란 국명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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