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다시 대추리를 찾았다. 마을 입구까지는 아직 꽤 남았는데 길 양쪽으로 방패를 든 경찰 십여 명이 늘어서 있는 첫 검문소가 나타났다. 버스는 잠시 멈췄다 가야 했다. 곧 이어 나타난 두 번째 검문소. 또 다시 버스가 섰다. 왼쪽으로 길게 둘러쳐져 있는 ‘캠프 험프리’ 기지 철조망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해 있는 경비병들도 전에 없던 풍경이었다. photo1갈라진 논, 상처 입은 생명의 자궁길 오른쪽은 원래 논이었다. 4월의 논은 미처 푸른 기운이 돌지는 않았지만 땅은 분명 촉촉하게 젖어 붉은 빛이었다. 한참 푸르러야 할 5월의 논은 쩍쩍 갈라져 속을 드러낸 채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촘촘한 철조망을 둘러친 것도 모자라 깊이 2~3m, 폭 1~2m 가량의 물웅덩이를 파놓아서 논으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드넓은 황새울 벌판 한 가운데 또 다른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군 포클레인의 이빨이 보였고 군데군데 커다란 검은 천막 아래 경찰들이 수십 명씩 앉아있었다. 작년 2월 문정현 신부와 대추리에 들어왔다는 해밀(평화유람단 ‘평화바람’ 활동가) 씨는 이 광경을 두고 “저 논에서 주민들이 직파한 모가, 생명이 자라고 있어요. 비가 오면 분명히 푸른빛을 띨 겁니다. 그 위를 함부로 밟고 헬기를 착륙시키는 걸 보는 주민들 심정이 어떻겠어요. 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건 태아를 품은 임산부의 배 위에 앉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대추리에서 눈에 띄는 군사시설은 위협적인 철조망과 경찰, 군인들이 햇빛을 피하는 임시천막이 전부였다. 논둑에는 대추리에 상주하는 경찰과 군인들을 위한 간이 화장실이 여러 개 늘어 서 있었다. 주위에는 쓰레기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비닐봉투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해밀 씨는 “군인들이 단체로 먹은 도시락을 그대로 방치해서 썩은 악취가 나요. 한편으론 동원된 군인들의 인권에 대한 고려도 전혀 없어요.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계속 흙먼지 속에 있거든요”라며 군인들이 들어 온 이후 마을의 상황을 전했다. photo2잔인한 5·4 행정대집행의 기억, 그 위로 나부끼는 ‘평화’제일 먼저 대추분교를 찾았다. 바스러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다시 일으켜 세울 엄두는 내지도 말라는 듯 철저하게 부수어 놓은 건물 잔해가 야트막한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산 위에서 ‘평화’의 깃발은 계속 나부끼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이 빛나던 유리창, 고운 시가 가득하던 초록색 벽을 다시 떠올리려 애쓰며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누군가 황급한 목소리로 기자를 불러 세웠다. “여기 사진 찍지 말아요! 군사시설보호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어요” 마을 주민 분이 걱정이 되어서 해 주시는 말씀인 줄 알고 “학교를 찍는 것도 안 되나요?”라고 되물었다. 그 때 또 다른 이가 뒤따라와 거칠게 물었다. “당신 누구야?” 기자가 아니라 군사시설보호법 운운하던 이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서 기자에겐 이렇게 얘기했다. “사진 마음껏 찍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군사시설보호법을 언급하던 사람은 평택서에서 나온 사복경찰이었다. 사복경찰은 “그래도 저기 기지 있는 쪽은 안 돼요, 처벌 받는다고” 라는 말을 덧붙이고 사라졌다.photo3“아주 간단해, 우리가 빨갱이여.”대추분교 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곳곳에서 파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빈집들은 거의 다 헐렸다. 그 중에는 ‘이 집은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집입니다’라는 푯말이 달려 있던 집도 있었다. 버티다 나간 이들의 집이었다. 길에 주민들은 없고 무리지어 다니는 경찰들이 자주 보였다. 포클레인 소리가 귀를 울리고 밭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 위로 군비행기가 낮게 날았다. 주민들의 몸은 대추리에 남았지만, 이미 그들의 삶은 다 빼앗겨 버린 듯 했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만날 수 없던 마을 주민 몇 분이 나무 그늘 아래 모여 계셨다. 서울에서 온 학생 기자임을 밝히자 할아버지들은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끊임없이 묻는 기자들에게 지치도록 얘기를 했지만 결국 밖에 가서는 보상금이 10억이 넘는다느니, 주민들 간에 갈등이 있다느니 하며 이간질만 시켜 놓는다고 했다. “딴 거 없어. 쉽게 생각허면 돼. 우리가 빨갱이여. 여그는 빨갱이 사는 데고, 저 너머부터가 대한민국이여. 안 그럼 워째서 들오는데 검문을 두 번씩이나 허고 카메라 설치허고 지랄이겄어? 농사도 못 짓게 허고. 우린 대한민국 국민 아녀. 주민등록도 다 태워버렸어”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잠이 제대로 와야 말이지. 군인, 경찰 놈의 새끼들이 밤새 왔다갔다 허는디. 논에도 못 나가보고 이게 사는 게 아니여.” 쩍쩍 갈라진 논이 생각나, 저 논들은 이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거냐고 물었다. “무슨 소리여! 볍씨 다 뿌렸는디. 물을 다 끊어놔, 물을 못 대게 해서 그렇지, 비 오면 다 싹이 나.” 할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평생을 흙에서 농군으로 사신 할아버지에게 땅과 그 위로 돋아나는 생명이 갖는 의미는 기자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각별한 것이었다. 현재 주민들의 건강 상태도 좋지 않은 듯 했다. 대추리로 정기무료검진을 오는 신경정신과 의사들에 따르면 주민 다수가 불안감이 너무 커서 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태다. 해밀 씨는 “손 쓸 수 없는 엄청난 폭력을 그대로 당하고 사는데, 몸이고 정신이고 온전할 수 없다”며 대추리에서 1년 넘게 거주 중인 자신도 불안 증세가 있다고 했다. photo4귀 기울이지 않는 이웃들한 할아버지는 얼마 전 동창회에서 다툰 이야기를 하셨다. “땅값이 오를 거 가텨? 지금이야 그렇지 인저 뱅기 뜨고 그래 봐. 오르나 어딜. 그런 놈의 거를 땅 팔아먹겠다고, 미군 들어오면 장사 해 먹겠다고 적극 찬성이니 뭐니, 현수막을 걸어 놔 그래, 동창회 허는 디다가. 미국이 이거 먹고 물러날 거 같어? 또 달라 그래, 또.” 사실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에 공감하지 않는 이웃들이 많다. 대추리로 들어가기 전, 평택 시내에서 만났던 한 할아버지는 대추리 일을 아시느냐는 질문에 “몰러, 나는 그런 거 몰러. 아무것도 몰라” 하시며 기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미군기지확장저지를 위한 평화마라톤’이 개최된 평택 공설운동장에서 분식을 파시던 아주머니는 “글쎄 내가 뭐 알어요. 주민들 입장에선 안 된 건데, 나라에서는 좋은 생각으로 하는 거니까. 상인들한테도 좋을 거 같고. 주민들은 보상 더 받으려는 생각인 거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남정수 민주노동당 평택시장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평택 시민들을 만나 대추리 이야기를 많이 꺼낸다고 했다. 언론에서 보상금 액수와 시위과정의 폭력만 부각시켜 대추리 이야기가 나오면 질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작 중요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나 국회의 잘못은 이슈화 되지도 않았어요. 시민들이 보수 언론의 보도에 휘둘리거나, 어차피 넘어간 거 지금 무슨 방법이 있나 하며 체념할까봐 걱정이 돼요” 하지만 고향의 땅이 파헤쳐지는 것을 걱정하고 대추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이웃들도 있다. 안산에 사는 임녕순 씨는 마라톤에 참석하기 위해 평택에 왔다. “고향이 대추리에요. 고향 떠난지는 30년이 넘었는데 요즘 언론에 많이 나오더라구요. 미군기지 문제는 찬성도 반대도 있겠지만 고향이 안타까워서 나왔어요”photo5“사람 사는 걸 들어내고 부술 수 있어?”기자가 대추리를 찾은 21일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대추리, 도두2리 주민들과 문화예술인, 인권단체활동가, 대학생들이 한데 모여 고기를 굽고 술잔도 기울였다. 음식상은 서울대책회의가 최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등을 통해 모은 성금과 서울대책회의 소속 단체 회원들이 자비를 털어 준비했다. 모처럼 긴장을 풀고 흥겨움을 나누는 자리였지만 마을 주민들은 ‘기자’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학생, 기자면 그런 것 좀 알어다 줘봐. 우리 여기 있어도 그냥 막 집 부수고 할 수 있는지. 사람이 집에 들어앉아 있어도 막 끌어내고 부술 수 있는지. 국방부 가서 한 번 물어봐 줘.”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한숨을 쉬며 덧붙이셨다. “우리가 갈 데가 어딨어. 여기서 그냥 죽어야지. 포클레인으로 뜨면 거기 찍혀서 죽는 수밖에 없어. 우리가 그 장정들을 어떻게 이겨. 그 날 하는 거 보니까 다리 한 짝씩 들고 끌어내는 거는 일도 아니겄드만.” 주민들 마음에 깊게 자리 잡은 불안과 탄식은 몇 잔 술로 쉬이 잊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