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문제는 딱 두 가지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과만 있으면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사과’와 ‘해명’을 접한 사람들이라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그는 고려대에 ‘입학’했다고 쓴 것은 부적절했다고 인정했지만(5월 26일 사과문), 입학과 합격은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5월 30일 인터뷰). 이력서를 쓰면서 자기가 합격한 대학 이름을 모두 쓰는 사람은 없다. 사회 경험이 많은 그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나 그가 번역한 책에서 역자는 ‘1996년 한동대 산업디자인, 1998년 고려대 의예, 2000년 버클리 음대를 거쳐 현재 서울대에서 공부중’인 것으로 소개돼있다. 입학과 합격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최소한 그에게는 ‘일관된 관행’인 셈이다.그는 「한겨레21」에 기고했던 적은 있지만 수습기자는 아니었다고 고백했으나(사과문), 「한겨레21」에는 그의 기고문이 없다. 기사가 몇 번 났다고 했지만(인터뷰), 그의 기사가 실린 것은 단 한 번이다. 이같은 실수는 개인홈페이지의 프로필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해명했지만(사과문), 그의 미니홈피 프로필에는 「한겨레21」과 같은 잡지 이름이 없고, 프로필 형태도 전혀 다르다.그는 이력을 부풀리고 선거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포스터나 정책자료집 등에서 이력을 기재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사과문), 11월 선거 자료집에는 문제의 경력이 모두 실려있다. 무산된 선거이니 괜찮은 것일까?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가 ‘지코프라임’에 합병되면서 고용승계를 하고 자신은 물러났다고 했다(3월 27일, 총학게시판). 그런데 그는 현재 ‘지코프라임’의 사원이다(사과문). 앞서 ‘지코프라임’에서 물러났다고 한 적은 없으므로 거짓말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는 사행성 게임과 황라열이 묶이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3월 27일, 총학게시판)’는 글을 읽으며 그가 ‘지코프라임’에서 근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다.그는 96~97년간 학생회도 한총련 활동을 안하던(인터뷰) 한동대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외대와 함께(인터뷰) 한총련에 올인하다시피 활동한 적이 있으며(5월 11일, 스누라이프), 96년 포항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동시통역 활동을 하고(후보경력), 96~98년간 홍대 클럽에서 베이스 및 키보디스트로 활동했으며(역자 소개), 97년 말 수능을 보고 고려대 의예과에 합격했다. KTX도 없던 시절인데 저 활동들을 어떻게 다 소화했을까.그는 선거 당시 8천만여 원의 기부금을 확보했다고 밝혔지만(3월 29일 정책간담회), 그 중 5천만원은 그가 속한 회사에서 약속한 것이었고(「대학신문」, 5월 29일), 그나마 그 회사는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한겨레」, 5월 30일). 그는 ‘대마’를 언급한 「스누나우」와의 인터뷰가 문제가 되자, ‘책임회피처럼 보일 수 있는, 이력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에 대해 전체적으로 오프를 걸었다’고 주장했으나(스누라이프, 5월 30일), 그 ‘실수’는 그가 발표한 사과문에서 스스로 언급한 내용이다. 이미 알려진 내용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를 거는 사람은 없다.이러니 해명이 의혹을 더 키우는 꼴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총학 홈페이지에서의 답변도 5월 30일 이후 그만 둔 상태이다(6월 2일 현재).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이고, 종강이고, 월드컵이 시작된다. 학생들은 관악을 떠날 것이고, 언론은 독일로 몰려갈 것이다. 설마 ‘그 때까지 조금만 더 버티기 작전’을 쓰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이유
처음에 문제는 딱 두 가지였다.그리고 제대로 된 사과만 있으면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사과’와 ‘해명’을 접한 사람들이라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그는 고려대에 ‘입학’했다고 쓴 것은 부적절했다고 인정했지만(5월 26일 사과문), 입학과 합격은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5월 30일 인터뷰).이력서를 쓰면서 자기가 합격한 대학 이름을 모두 쓰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