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 선거판, 재정립이 필요하다

어느 덧 쌀쌀한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캠퍼스 수천 솔로들의 추운 마음을 대변하듯, 청년실업 50만에 취업 길 찾지 못하고 있는 고학번들의 씁쓸한 마음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어느 덧 쌀쌀한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캠퍼스 수천 솔로들의 추운 마음을 대변하듯, 청년실업 50만에 취업 길 찾지 못하고 있는 고학번들의 씁쓸한 마음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쌀쌀한 그리고 때론 한기까지 느끼게 하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우울한 계절에 열리는 관악의 선거, 선거다.작년 수일의 연장투표 끝에서도 정족수 미달로 개교 이래 처음으로 총학생회 재선거라는 불명예를 연출한 관악 선거판의 앞날은, 미안한 말이지만 올해도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학생회비 납부율 사상 최저, 각종 학내 언론에서 비추어지는 학생회 관련 사업의 썰렁함,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학생회 회의론 등. 얼마 전 눈 씻고 찾아봐도 불과 수명만이 보였던 대학신문에 게재된 전학대회 공청회의 모습은 정말 눈물겨워 못 볼 지경이었다.관악 선거, 왜 추락하는가?도대체 선거는 왜 하는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총학생회장 선거. 이른바 왜 우리는 누군가를 ‘찍어야’ 하느냐 말이다. 이게 왠 ‘오뉴월의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 서울대저널 실망이다’라고 속으로만 되뇌지 말고 끝까지 읽어보라. 선거는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대표를 뽑는 방법이다. 그럼 대표는 왜 뽑는가? 지역적, 물리적 이유로 개개인이 직접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모두 참여하기 어려우니까. 또한 내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대표’가 나선다면, 나의 이익이 증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또한 공명정대한 대표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사익을 추구하거나 일부 집단에 함몰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 증진을 위해 힘쓸 테니까. 매우 거칠게 서술했지만 실제로 위의 내용이 민주주의의 아버지, 조상, 할아버지 등 각종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몽테스키외, 로크, 버크 등이 대의제를 옹호하며 들고 나왔던 주장들이다.그렇다면 왜 관악 선거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는가? 뒤에서부터 짚어보자. 총학생회에 나선 몇몇 선본은 논외로 치더라도, 관악 선거판은 노골적으로 개별 집단의 이해관계를 주장한다. 아니 어쩔 때는 이 선본들이 학생들을 위해, 혹은 각 단대를 위해 출마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출마집단의 이데올로기 과시와 지지자 결집을 위해 선거라는 이벤트를 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가 많다. 신자유주의 반대와 민족공조를 외치기만은 미안했는지 이른바 ‘후생복지형’ 공약들은 잘도 ‘첨부’해 두었다, 부록으로. 처음부터 왜 서울대학교,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러한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왜 필요한지, 공동체 발전을 위해 그리고 대학이 속해있는 사회라는 좀 더 거시적 공동체 발전을 위해 어떤 순기능을 가지는지 주장한다면 그것은 대표 선거에서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로 자격을 갖춘다.둘째로 학생회는 스스로 세일즈에 실패했다. 굉장히 시장주의적인 관점이지만, 왜 학생회가 학생들을 위해 필요한지 그 의미를 전혀 각인시키지 못하고 있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지, 본부와는 어떤 교섭을 하는지, 또한 대학 구성원을 대표해 학생회는 어떤 사회적 의견 표명을 하는지, 고로 학생회의 작동이 내 삶과 어떤 연관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국가로 따지면 국회에 해당하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전학대회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알지 못하는 전체 학생이 대다수다.분위기 반전을 위해학생들이 학생회에 대한 이해관계를 크게 못 느낀다면, 학생회가 사는 법은 하나다. 학생들의 이해관계를 크게 결정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장학금 수여, 동아리 지원금 분배와 같은 실질적인 것에서부터 외국대학과의 교류와 사회 의견 표명 등 대외적 대표성 문제, 그리고 결정사항들에 대해 개별 학생들에 대한 강제력 강화 등을 통해 학생회의 대 본부, 학생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학생회, 엄밀히 말해 집행부는 이런 자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총학생회장 개인에게 이런 막강한 권한을 주었다간 오판에 의해 피해가 커질 수 있으며, 스스로 부패할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집행부는 전체 학생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아니기에 우리를 대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선발되어 혹은 자원해 정책을 만들고 일할 자격만을 갖추고 잇는 것이다.그러나 여기까지 읽고 범람하는 ‘고양이 목의 방울 달기’식 글이네 하고 피식 웃는 현명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총학생회도 다 죽어가는데 무슨 수로 저 막대한 권한들을 본부로부터 혹은 스스로 창출해 내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썰렁한 가을 선거 분위기 청산을 위해 ‘관악 총선’ 의 필요성은 싹튼다. 이미 외국 특히 미국 쪽 대학에는 ‘학생 의회'(Student Council)가 발달해 있다. 이들은 학생사회를 대변해 학교 당국과 협상하며, 더 나아가 주정부에 대해 요구사항을 표명하기도 한다. 또한 외국 대학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주체로서 그 역을 담당한다. 또한 학생의원들은 생활 속에서 학생들과 같이 고민하며 공동체 개선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다. 즉 학생들로부터 얻은 광범위한 정당성을 바탕으로 학교 당국과 대학 운영의 동등한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관악 총선, 그것은 꿈인가?그러나 서울대학교는 어떤가? 각 단대 임원들은 전학대회의원 자격까지 자동 획득한다. 그러나 이는 국가 차원에 비유하자면 지자제 위원장이 국회의원까지 겸하고 있는 꼴이다. 이건 명백한 위헌이다. 한 투표가 두 가지 상이한 직위에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미 단대 차원의 선거가 뜬구름 잡기식 주장 남발로 학우들의 관심을 잃은 지 오랜데, 이들이 전학대회 의원을 겸한다? 민족공조와 노동자 단결만을 위해 관악 선거에 참여한 ‘언발란스’를 연출하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단대 선건데 이들이 서울대학교와 관련된 내외부 사항을 결정하는 전학대회의 의원으로 활동한다?오늘날 텅 빈 객석과도 같은 전학대회의 모습은 바로 이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 다름 아니다.이런 식으로 운영되면 단대도 총학생회도 죽고, 또 본부에 대한 학생회의 저자세도 극복되지 못한다. 실제로 본부와의 각 종 협상이 총학생회 집행부 소수의 사적 경로를 통해 진행되어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 관계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를 총학생회 측이 안고 있을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며, 공개되지 않은 관계 속에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정리하면, 총선거를 통해 학생들의 인준을 받은, 수십 명 단위의 의회라는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사회 분위기 쇄신이다. 선거가 정파 단위의 ‘그들만의 쇼’라는 관성에서 벗어나 재도약의 기반을 갖기 위해서다. 둘째, 대본부 협상력 증대다. 개인이 아닌 제도, 사적 라인이 아닌 시스템이 존재하는 데 어떻게 본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바란” 조용함 속에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총학생회에 대한 감시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또한 기능 강화는 그 반대급부로 총학생회의 대표성 강화를 가져온다. 총학생회 사업을 집행부 회의라는 학생들로부터 인정되지 않은 회의체를 통해서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학생 대표자들의 집합체인 의회로부터 비준 받는 것이다. 짜를 것은 짜르고 밝힐 것은 밝히는 과정을 통해 대표성은 증진된다. 만약 이와 총선을 통해 다시 한번 학생사회가 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면, 그 어찌 헛된 시도라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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