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1일본 각지의 수많은 고교 야구 선수들이 오직 이 곳의 땅을 밟기 위해 애쓰는 곳. 우리에게도 만화, 게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여름의 고시엔(甲子園)’. 일본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고시엔 구장은 가히 고교야구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는 본선 전 경기가 지상파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며, 프로야구 못지 않는, 아니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적어도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파-리그)보다는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조선에서도 출전했던 고시엔1915년 제1회 대회가 열린 이래 올해 86회째를 맞이한 역사 깊은 이 대회는 각 지역별 예선을 거친 팀만이 참가하기 때문에 일종의 전국 대항전이다. 특히 프로야구 팀이 없거나 사회, 경제적으로 좀 소외된 지역일수록 지역 대표에 거는 기대가 커서 대회 기간에는 지역 사회의 최대 화제가 된다. 올해 우승팀인 홋카이도의 코마다이토마코마이(駒大?小牧) 고등학교는 홋카이도 고등학교 중 고시엔 사상 처음으로 우승하여 홋카이도 전체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결승전 중계의 홋카이도 내 시청률은 46%에 이르렀다고 하고, 홋카이도 전역에 축하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그간 ‘H2’ 같은 일본 야구 만화를 보면서 ‘음, 나도 고시엔을 밟아봐야지’고 생각해 오던 필자, 8강전이 열리는 고시엔에 가 보았다. 고시엔에서 멋진 플레이와 잘 짜여진 응원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필자의 머리 속을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90년 전통의 고시엔이라면 한국에서도 참가했었다는 말인가?’photo2자료를 살펴보니 ‘고시엔의 로망’은 조선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예선을 거쳐서 한 팀씩 참여하였는데, 소위 문화 통치가 시작되었던 1921년, 부산상고가 처음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경성중(현 서울고), 휘문고보, 경성상고(서울상대의 전신), 대구상고, 평양중, 용산중(현 용산고), 선린상고 등이 고시엔을 밟았다. 이 중 경성중이 총 5차례로 최다 참여하였으며, 부산상고와 휘문고보, 경성상고가 8강에 1차례씩 진출한 것이 최고 기록이다. 조선뿐 아니라 대만과 만주 대표도 출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식민지 지역의 고시엔 출전은 전쟁이 격화되어 대회가 중지된 4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민족 전체와 따로이 개개 민중의 삶은 존재이렇게 장황하게 당시 조선의 고등학교가 고시엔에 진출한 역사를 적어본 것은 이것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역사를 뒤집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우리는 흔히 ‘일제시대’라고 하면 모든 역사가 정지한, 아니 퇴보했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안 될 ‘암흑의 시대’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주권을 외국에 빼앗겼다는 것은 한 나라, 한 민족에 있어서 치욕스러운 일임에 틀림 없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전체로서의 민족이 아닌 당시 개개 조선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암흑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살아나가야 했다. 이 중에는 항일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을 지속해 나갔을 뿐이었다. 일제에 의한 가혹한 수탈이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민중은 언제나 수탈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혹시라도 일제의 대 조선 정책이 유화적이었다면, 일반 민중들은 일본을 오히려 반겼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일본에 호의적인 대만처럼.차별이 존재하긴 했지만, 조선인들도 어느 정도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실력이 있다면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 또한 야구도 조선 리그에서 우승을 하면 배타고 기차타고 하면서 그 먼 고시엔까지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각자 살 방도를 찾아나갔던 것이다. 미약하나마 상업 자본을 일으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면서기로서 일제의 녹을 받아 먹고 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반픽션이기는 하지만 ‘영웅 시대’와 같은 여러 드라마에서는 항일 투쟁의 이야기보다는 그 당시 일반적인 민중의 생활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들은 결국 ‘할 건 다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암울했던 시대상과는 잘 병치되지는 않는다. 전체로서의 역사에 매몰되어 그 속의 개인은 잘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일본 국민은 모두 제국주의자?photo3그리고 우리가 식민지 조선을 배우는 동안 과연 식민지 시대의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만큼 알고 있을까? 한국인의 상식과 배치되는 사실 중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관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 히로부미.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조금은 알려졌지만 이토는 사실 ‘조선합병’을 반대 또는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온건파였고,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의 정한론을 이어받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강경파와 대립하고 있었다. 강경파는 러일전쟁 개전을 늦추는 이토를 문약한 정치가라 비판하였고, 암살 계획마저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09년 이토의 죽음으로 인해 강경파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조선의 식민지화는 더 빨리 진전되었다. 강경파는 이토의 암살 후 군국주의 일본을 만들어 나갔고, 결국 패망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물론 이토 역시 조선을 식민지 지배의 대상으로 본 것은 다르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한 면만을 봤던 것이 사실이다.한편, 일본의 민중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에 고분고분했던 것만도 아니다. 일본의 민중 운동사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일본에서 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상당한 민중 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물론 서양의 시민 혁명과 같은 수준의 운동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보통 선거권을 요구하는 20년대의 운동이라든지, 군국주의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은 상당히 치열했다. 필자가 있었던 교토대는 당시 학생 운동의 메카로서 대학 군사 교육에 반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사회과학연합회’ 사건을 통해 일본의 국가보안법인 ‘치안유지법’이 가장 먼저 적용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자들도 상당한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40년대에는 징집에 거부하면서 반전 데모도 일어났다. 이 와중에 한·일 노동자간, 공산주의자간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즉, 식민지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일본인들도 극심한 국가 권력의 압제에 시달렸었고, 일본 민중 역시 이 점에 있어서는 피해자인 것이다. 일본을 바라볼 때,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이라는 민족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알려주고 싶은 것만 알려주는 국사구한말이래 광복 전까지 일제가 한반도를 대상으로 침략과 수탈을 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과거이다. 하지만 현재의 국사 교육이 상당히 민족주의적으로 치우쳐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가 식민지 시대의 압제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고 있는 것은 국사의 속성상 당연할지도 모른다. 대립각으로서 일본을 둠으로써 민족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민족 정체성을 세운다는 국사의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분리와 적대를 통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면만을 강조하여 자학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특히나 우리의 국사 교육이 국정 교과서 단일 체제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필자에게도 여전히 낯설고, 많은 사람들이 ‘착실한’ 국사 교육을 통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당시 사회 현상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주류 역사학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혹은 일제 시대에 그러한 발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 존재마저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계속된 논의를 통해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는 아쉬워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photo49월의 서울대를 장식했던 이영훈 교수 발언 사건도 이러한 관점 위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직접적인 설화의 원인은 어찌된 연유인지 위안부 할머니와 성매매 여성이 동일 선상에 놓여버린 것처럼 이해된 데 있지만(이 역시 한편으로는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공격에 다름아니다),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은 것은 배후에 이러한 역사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악의 축’임은 분명하지만 객관적, 실증적으로 증명이 되었다면 그 안에서 일제의 ‘선’과 조선의 ‘악’은 인정되어야 한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거나 아니면 우리가 일본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있어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과거 청산, 가능한 한 빨리과거 청산 문제에 있어 반대 패널로 나왔던 이영훈 교수지만, 그의 견해는 과거 청산의 필요성을 역설해 주기도 한다. 이 교수가 뚜렷이 지목했던 성노예 징발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이에 가담한 조선인 역시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국사 뒤편의 개개 민중들의 다양한 삶-일제 치하에서 농사를 지었던 사람, 혹은 공부를 해서 경성제대에 들어갔던 사람, 칼을 찬 교사가 되었던 사람 혹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내 놓는 것이 과거 청산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일본의 책임 감경과 연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반인권적, 반인륜적 침략, 수탈,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일본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며,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번 대대적인 과거사 정리를 통해서 과연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밝힐 수 있다면, 일본의 책임 소재도 더욱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안으로의 청산과 밖으로의 청산. 더 늦기 전에 끝내야 할 것이다.일본 젊은이들은 과거 일본제국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행위자가 아닌 자신이, 역시 직접 피해자가 아닌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어떤 사과를 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갖고 계신 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과거사 정리의 의미는 퇴색한다. 그나마 기억과 상처가 아물기 전에 과거사를 되돌아 보고 과거사 논쟁에 대해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