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8 여성의 날,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옷, 분홍색 보자기를 두른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대학로를 활보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쳐다만 본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랄하게 거리를 행진하는 그들에게 누군가 정체를 묻는다. “우리요? 여성정치인경호본부입니다!” 생경한 이름, 그러나 경호원을 자처하는 그들의 얼굴을 그리 낯설지 않다. ‘어디서 본 얼굴들인데?’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 커진다. ‘유쾌한 정치반란’을 꿈꾸는 사람들, 여성정치인경호본부(경호본부)가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나섰다.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들은 멤버들부터가 상당히 화려하다. 영화 평론가 유지나 씨, 편집장 최보은 씨, 여성학자 오한숙희 씨, 사진작가 박영숙 씨 등 내로라하는 70여명의 여성계 인사들이 경호본부를 구성하고 있다. 총무를 맡고 있는 어하현숙 씨는 경호본부가 “문화, 방송, 언론, IT 등 각 부문에서 따로 활동하던 여성 운동가들의 열린 네트워크”라고 설명한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라는 공통의 미션을 놓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살려 힘을 보태자는 의미죠.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모인 게 더 큰 힘을 가지니까요.” 게릴라식 활동으로 임무 수행 경호본부는 사무실이 따로 없다. 평소 구성원들은 이메일을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경호본부의 임무는 멤버들 각자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상시적으로 수행된다. 이러한 ‘게릴라 식’ 활동은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해 홍보된다.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정치인들에 대한 보호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남명숙 의원 성 비하발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경호본부 멤버인 고은광순 씨와 어하현숙 씨가 직접 부산에 내려간 것이 그 예이다. 이들은 사건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사건의 부당함을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해 알려냈다. 경호본부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인터넷이다.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유쾌한 정치 뿐만 아니라, 경호본부는 갖가지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홍보하고 있다. 지난 3?8 여성대회 때 단체로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옷, 경호본부 이름이 새겨진 보자기를 착용한 채 거리를 행진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앞으로 열릴 여성마라톤대회에도 경호본부의 이름으로 참여할 계획이라고 한다.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도 벌써 참가 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이 때 무대 위에서 “유지나 기획, 금오순애 연출의 ‘검사스러운’ 토크쇼”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여성 정치를 유쾌하고 즐겁게 표현한다는 데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요. 하지만 유쾌하다고 해서 결코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어하현숙 씨의 말이다. 오순애 씨에 의하면 “과거와 같이 어두운 곳에 숨어서 하는 것, 우울한 것의 이미지가 강했던 여성운동이 이제는 보다 밝고 유쾌한,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경호본부가 탄생했다고 한다. 사실 경호본부의 결성 배경에는 여성 정치세력화에 대한 여성운동가들의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 여성 정치 진출은 여성 전체의 몫 경호본부를 결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작년 10월에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기획했던 ‘제주도 여신 기행’이었다. 오한숙희 씨, 박영숙 씨, 한의사 이유명호 씨 등 국내의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고, 세계적인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이 자리에 초청되었다. 스타이넘과의 만남은 이들에게 큰 경험이 되었다. 미국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남성정치인 지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스타이넘은, 여성의 정치 진출이 개인의 몫이 아니라 여성 전체의 몫임을 강조했다. 또, 의정활동의 감시와 지지, 격려의 필요성과 남성권력중심 사회에서 여성 정치인을 보호할 세력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여성 정치세력화에 대해 비슷한 고민들을 안고 있던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은 행사가 끝난 이후에도 논의를 이어나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고은 사람’이었다. 양성평등이 후보 검증의 기준 고은사람은 여성운동가 고은광순 씨를 내년 총선에 당선시키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한국 현실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남성 정치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고, 우리의 ‘검증’을 거친 여성정치인 후보자를 발굴해내자는 데 의견을 모았죠. 그래서 나온 후보가 고은광순 씨에요.” 두 번째 모임에서 고은사람은 경호본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고은광순 씨 뿐 아니라 좁게는 강금실 장관, 넓게는 억압받는 여성정치인과 여성후보들까지 지원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기로 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그렇다면 경호본부가 후보를 ‘검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하현숙 씨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양성평등이죠.”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과 남성의 공존을 모색해나가는 것이 양성평등”이라고 정의한 어하현숙 씨는, “여성정치인 중에도 남성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며 생물학적 성별이 지지의 이유는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정치는 생활의 문제 현재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299명 중 여성의원은 60여명에 불과하다. 지방의원도 전체 4094명 중 여성의원의 수는 91명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5%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UN의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개발지수(GEM: 여성의원 비율, 여성의 고위행정관리직 비율, 여성의 전문기술직 비율 등에 의하여 산출한 지수)는 66개국 중 61위로 나타났다. 외국에 비해서도 한국의 여성 정치 참여 비율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은 여성정치세력화의 당위성을 보다 높이는 요인인 동시에 경호본부의 발목을 잡는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남성권력 중심사회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까닭이다. 경호본부 멤버이자 한의사인 이유명호 씨는 여성 정치세력화의 큰 걸림돌로 남자들의 이기심과 독점욕을 꼽는다. “호주제도 따지고 보면 누가 주인이냐는 헤게모니 다툼”이라고 말한 그는, 남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나누고 싶지 않아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순애 씨는 “남자를 적으로 본다는 오해” 역시 걸림돌이라고 덧붙이며 경호본부가 지향하는 양성평등은 여성과 남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앞의 두 사람이 남성의 태도에서 문제를 찾았다면, 오한숙희 씨는 다른 측면에서 문제를 지적한다. “여성들의 무관심이야 말로 가장 큰 문제”라고 주장한 그는, “여성들도 정치가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밤길을 혼자 마음놓고 다닐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정치라는 것이다. “여성들의 삶 속으로 정치를 끌어오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유쾌한 정치반란’ 가능할까 이들의 활동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1차 프로젝트인 고은광순 씨 국회의원 만들기까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 스스로가 지적한 것처럼, 여러 장애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추가취재 후 보충할 부분) 과연 경호본부의 활동이 경직된 남성중심의 정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또, 여성들 스스로가 삶과 정치를 연결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현재 그들의 ‘유쾌한 정치반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