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자(이하 기) : 일부에서는 진보-보수의 개념을 ‘현실 타개성’냐 ‘현실 손질성’이냐의 성향에 따른 구분이며, 리버럴은 변혁하겠다 또는 손질하겠다는 노선을 처음부터 정해 놓지 않고 바꿀 것은 바꾸고 놔둘 것을 놔둔다는 식의 사안별로 접근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리버럴’이라는 용어는 위의 정의와는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혹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리버럴’은 현실 정치, 사회, 경제 노동 영역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의미합니까? 유시민(이하 유) : 리버럴(자유주의자)은 무엇보다 국가 또는 사회의 선택보다 개인의 선택을 우선 존중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실질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한 국가나 사회가 그 개인의 선택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시장경제를 경제적 기본질서로, 복수정당제를 기초로 한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적 기본질서로 인정하는 것은 이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고 존중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리버럴은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이를 침해하는 법률, 제도, 관습, 이데올로기와 싸웁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키느냐는 구체적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저는 리버럴로서 당원에게 아무 권한도 주지 않는 정당체제와 싸웁니다. 국가상징물 앞에서 주권자인 국민으로 하여금 공개적인 충성 서약을 하게 하는 국민의례에 반대합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원합니다. 성차별을 제도화한 호주제 역시 폐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파업권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으로 인정하며 이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노동관계법을 개정해야 하며, 그런 전제 위에서 불법파업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하며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데 찬성합니다. 기 : 손호철 교수는 2001년 중앙일보 기획시론 ‘이념논쟁 이렇게 본다’에서 ‘서구의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보여주듯이 보수는 군사독재세력이 아니라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의미하며 진보는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불평등에 주목해 이에 비판적인 사회민주주의 등의 입장을 의미한다.’라는 멘트를 했습니다. 리버럴을 위와 같은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유 : 리버럴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정착된 곳에서는 보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진보적입니다. 지켜야 하는 것보다 고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버럴은 리버테리언(libertarian, 자유지상주의자)와는 다릅니다. 자유방임이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지 않으며 시장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다만 국가가 불가피하게 개인의 선택을 규제하고 개입하는 경우에도 그 수단이 최대한 시장친화적(market-conform)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 : 선생님께서는 1월 16일 MBC 백분 토론, ‘정당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대략적으로 현 정당들의 이념좌표를 구분해주셨습니다. 물론 현재 정당들이 지역적, 그리고 특정 인물 중심적으로 쏠려 있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면 한나라당은 보수적, 그리고 민주당은 보수 리버럴, 민주노동당은 진보적으로 분류하셨는데요. 위 토론 맥락을 보거나 지난 10월 서울대 토론회에서 “개혁국민정당은 진보자유주의 정당이다.민주노동당은 지나치게 전투적이며 좌파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다.” 등의 발언을 미루어 볼 때, 유 선생님은 진보자유주의, 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등을 표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진보자유주의는 구체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어떻게 구현되며(경제정책, 노동문제에 대한 태도 등등) 현 민주당의 보수자유주의와는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까? 유 : 저는 민주당을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정당으로 평가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것은 그가 민주당내 소수파인 진보 리버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진보 리버럴로 규정합니다. 진보 리버럴과 보수 리버럴은 한국사회의 현재 상황을 다르게 평가합니다. 한국 사회가 이미 완성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믿으면 보수 리버럴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진보 리버럴이 됩니다. 사회가 지향하는 최고목표(예컨대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안정, 환경보호 등)에 대해서도 보수 리버럴과 진보 리버럴은 각기 다른 무게를 부여합니다. 보수 리버럴은 자유와 안정에, 진보 리버럴은 평등, 정의, 환경보호 등에 무게를 둡니다. 가치지향과 상황인식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기 : 선생님께서는 종종 노무현 당선자가 여의치 않았다면 개혁당의 후보로 대선에 임할 수 도 있었다는 멘트를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노무현 당선자와 개혁당, 그리고 전 당수였던 선생님 사이에는 이념적, 정책적 일치 영역이 비교적 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즉 노무현 후보의 이념좌표를 과감히 리버럴, 그리고 진보자유주의에 보다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유 : 그렇습니다. 기 : 인수위의 경제, 사회 정책 등을 예로 말씀해주시면서 평가해주시면 더 좋을 듯 합니다. 유 : 인수위는 정책을 추진하는 곳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조직입니다. 단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인수위는 재벌개혁 및 금융개혁과 관련해서는(경제 1분과) 시장의 투명성과 경쟁의 공정성을 높이고 경제권력의 집중을 완화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경제2분과와 사 회문화분야에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대우 시정, 부당노동행위 시정, 양성평등의 진전, 주5일근무제, 사회보험의 확대강화 등 사회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의 실현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 리버럴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사적인 루트를 통해 인지하고 계신 노무현 후보의 생각을 바탕으로 이야기 해주시면 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겠죠 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국민경선 후보 시절 국가보안법을 ‘문명국가의 수치’로, 호주제를 ‘득 보는 사람은 없고 피해자는 많은 불필요한 제도’로 규정했습니다. 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지는 참모들과 맞담배를 하고 격의 없는 토론을 하며 논리적으로 이해를 하기만 하면 자신의 견해를 아무런 감정적 거부감 없이 수정하는 등 이견집단과 개인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보 리버럴의 미덕이라고 봅니다. 기 :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방향을 독일식 질서자유주의로 평가하기도 하며, 혹은 제3의 길과 같은 중도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쓰시거나 이해하고 계신 위의 이념 및 노선에 대한 간단한 멘트와(제3의 길 등등에 대한), 이런 세간의 평가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노무현 정부에 대한 적절성 및, 리버럴과의 연관성 등등)을 알고 싶습니다. 유 :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지도자입니다. 그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과 그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질서자유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제3의 길과 신중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독일의 우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좌우대립의 시대에 제시한 대안이었다면 제3의 길은 유럽 좌파가 제시한 20세기 말 정보화와 세계화 시대의 대안입니다. 이 둘은 넓은 교집합을 지니고 있으며 지구촌 시대의 개별 국민경제는 이 두 대안을 비판적으로 소화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은 투명성과 공정한 경쟁을 중시하는 미국식 규범과 국가의 사회정책과 정책수단의 시장친화성을 강조하는 독일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경제체제와 정책의 국제적 상호연관성을 무겁게 고려하는 제3의 길 등 세 요소를 모두 포함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노무현 정부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라는 세계적 조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둘 모두 아직은 안착하지 못한 한국적 상황에서 진보 리버벌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 가치를 달성 하는 데 사용할 정책수단을 전형적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봅니다. 기 : 마지막으로 개혁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하고, 민주당 내에 소장파, 개혁파 의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당내 세력교체, 개혁 드라이브에 나선다면, 민주당과 개혁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을까요? 즉 선생님이 평소에 말씀하신 대로 이념을 중심으로 정당들의 새판이 짜여진다는 의미에서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원웅 의원의 경우에서처럼 전 통추 멤버들이 당을 넘나들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지금까지 멤버들끼리 비슷한, 즉 ‘리버럴’을 공유하고 있다면요. 이념좌표에 따른 인위적 정계개편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유 : 정계개편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2003년에 벌어질 정계개편은 기성 정치세력의 수평적 이합집산을 통해 의회권력의 집권세력이 장악했던 과거의 정계개편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다가온 정계개편은 보수, 자유주의, 진보를 막론하고 정당 구조의 근본적인 개편과 정당 내부의 권력 분산, 청와대와 국회의 관계 재정립 등을 수반하는 다차원의 총체적 정치지형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저는 전망합니다. 우리는 2004년 총선 이전에 영호남으로 갈라진 한나라-민주 양당의 극한 대립을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낡은 정치지형이 눈앞에서 뒤엎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