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의 기억과 서울대

…4월 19일 정오 무렵 우리는 태평로 국회 의사당을 거쳐 지금은 광화문이 들어서 있는 중앙청 앞 광장까지 달려온 후 잠기 연좌를 하고 있었다.김치호가 우리 앞에 나섰다.오전에 이미 경찰에 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했노라고, 그러나 굽힘없이 불의와 싸워나가겠노라고 결연히 선언했다.얼마 후 우리는 경무대 쪽으로 몰려갔다.우리 앞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입구 가까이 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4월 19일 정오 무렵 우리는 태평로 국회 의사당을 거쳐 지금은 광화문이 들어서 있는 중앙청 앞 광장까지 달려온 후 잠기 연좌를 하고 있었다. 김치호가 우리 앞에 나섰다. 오전에 이미 경찰에 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했노라고, 그러나 굽힘없이 불의와 싸워나가겠노라고 결연히 선언했다. 얼마 후 우리는 경무대 쪽으로 몰려갔다. 우리 앞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입구 가까이 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곧 이어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많은 학생들이 쓰러졌다. 김치호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93년 장회익 교수가 쓴 글 속에서 발견되는 김치호 (金 致 浩)씨는, 60년 4월 19일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해 뛰쳐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은 6명의 서울대 선배 중 한 명이다. 또한 그는 필자가 며칠 간 학교의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적거린 결과 단 몇 줄의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서울대 4.19 관련 열사이기도 하다. 4. 19 당시의 서울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 도중 사망한 최주열 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4월 혁명은 급물쌀을 타게 된다. 단순히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지탱한 착취·수탈구조,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외세의존의 매국정권, 냉전·분단구조에 대한 항거로 이어 졌던 4월 혁명은 당시 유일하게 의식화되고 집단적일 수 있었던 학생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서울대 역시 그 역사의 순간에 있었다. 3.15 부정선거 이후 산발적으로 데모를 해오던 서울대 학생들은 4월 15일 문리과대학에서 신입생환영회라는 명목으로 대의원회를 열고 거사에 의견을 모았다. 학생들은 정치학과 3학년들을 중심으로 격문 4000매와 리플렛 4000매를 프린트하는 등 19일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19일 아침에 등교한 학생들은 18일 고대 학생들이 폭행 당한 사실에 더욱 흥분되어,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을’이라는 제목의 「4.19선언문」을 낭독하고 9시 20분 교문을 나섰다. 경찰의 곤봉에 피를 흘리며 바리케이트 뚫은 시위대는 원남동 로터리를 지나 종로 2가 파고다 공원 앞에서 다시 방독면을 쓴 경찰대의 제2저지선과 마주쳤다. 여기서 한 10분쯤 연좌한 학생들은 뒤따라온 제2진과 합류, 고함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달렸다 이 때 4.19의 첫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서울대 학생들은 최루탄을 뚫고 동국대, 성균관대 생 등 1만여명과 함께 경무대 앞으로 나갔다. 이 곳에서 앞서 말한 김치호 학생이 죽은 것이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경무대에서의 경찰의 실탄 발포로 시민, 학생 수십 명이 사망, 부상당했고 전국적으로 124명이 사망, 558명이 부상당했다(정부 발표). 이에 4월 25일 전국 교수단이 14개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한 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했다. 이에 힘을 얻은 시민, 학생 1만여 명이 철야 시위를 벌였고 드디어 4월 26일 10시 20분,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했다. 4.19부터 5.16 사이의 서울대 민주화 운동 이승만 하야 이후에도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의 민주화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서울대 학생들의 경우, 4.19에서 61년 5.16 사이, 총학생회를 새로 꾸리고 바로 뒤의 7.29선거를 대비하여 국민계몽대를 발족, 전국의 선거구에 나아가 4월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선거를 통한 정치, 경제, 사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새생활운동,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2대 악법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통일 논의가 활발해져 문리대, 미대, 법대 등 전 대학의 발기인 263명이 11월 1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발기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울대 민통련은 이후 통일 운동의 흐름을 이어 받아 61년 5월 남북학생회담을 정식으로 제기하기에 이른다. 교내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각 단 대에서는 대의원과 학생회장을 선출하고 ‘서울대학교 학생회 헌장’을 제정, 공포하는 등 명실상부한 학생자치의 시대을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학교 개혁이 단행되었는데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서는 학생들이 편파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신사훈 교수의 사퇴를 종용하고 철야농성을 벌여 결국 신교수가 학교를 떠나기도 하였고, 상과대학에서는 상대 총학생회가 결의문을 통해 어용 교수 축출과 무능 교수 배척을 요구하며 전학생이 동맹휴학에 들어가 결국 상과 대학의 모든 교수가 사표를 제출하는 등 교수진이 획기적으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한편 4.19 당시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대학 교수들이 4.19에 의해 크게 각성하여 사회 및 학원 민주적 구조개혁을 위한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 흐름은 크게 당시 불법화되어 있던 교원노조운동과 대학의 자주화 내지 민주화 운동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특히 교수들은 학원의 자주성을 살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들은 6월 19일 서울대교수친목회를 발족시키고 이를 교수협의회로 발전시켜 교수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편 총장 인준투표권과 하강인준, 그리고 교수 인사투표권 등 자율적인 권한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교수들은 사회 전반의 개혁, 특히 정치적, 경제적 개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여 1960년 하반기 「대학신문」의 지면 대부분이 그러한 내용으로 채워지기도 하였다. 4.19를 기억하는 것 되돌아보면 바로 이 서울대라는 공간에서 4.19를 전후로 한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선배들과 그 친구들이 경찰의 총에 의해 죽기도 하고, 그 결과로 대통령이 하야하기도 하고, 대학 내에서는 민주주의가 획기적으로 진전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있어 4.19는 ‘퇴색한 과거의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듯하다. 4.19 기념 마라톤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줄고 있고 그나마 마라톤 역시 하나의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고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학신문 2~3면을 채우던 4.19 특집 기사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4월 혁명이 더 이상 학생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사회대의 김진균 교수는 “4.19 당시의 학생운동에 대한 자료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서울대생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만약 현재의 서울대생들이 과거 사회 변혁운동에 앞장서 왔던 선배들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 그것을 ‘서울대’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다면, 지금의 학생들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단순히 한 명의 엘리트로서가 아니라 시대의 양심으로서 형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위해 4.19 뿐만 아니라 이후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서울대 학생운동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4.19 기념관(민주화운동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개개인의 기록들, 각종 사진, 영상물 등을 전시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서울대의 역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내에서는 4.19 세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를 주장하여 학교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4.19 기념탑을 두레문예관 쪽으로 이전하는 등 일련의 성과를 낳고는 있지만 교수들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 정국로, 한국 학생운동사(1995), 서울대학교교수민주화운동오십년사발간위원회,서울대학교수민주화운동50년사 (1997), 육일회 편, 4월민주혁명사(1992), 4월혁명연구소 편,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 혁명(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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