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두리반 투쟁 승리를 계기로 문화 시위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제 2의 두리반이라고 불리는 명동 카페 마리를 비롯해 서울대 본부스탁, 희망 버스 토크 콘서트, 포이동 판자촌 벽화 그리기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 시위가 열리고 있다. 기존의 과격한 투쟁 방식에 거리감을 느꼈던 젊은 세대들은 이제 보고 듣고 즐기며 투쟁한다. 문화의 힘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으며, 이들은 ‘공감’과 ‘연대’라는 가치 아래에 시위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두리반, 노래하고 춤추며 승리를 쟁취하다 2011년 6월 8일, 재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홍대 ‘두리반’이 승리의 협상을 이뤄냈다. ‘두리반’은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밥이라는 뜻으로,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칼국수를 팔던 식당이다. 평화롭던 두리반은 2009년 12월 25일 인천공항행 경전철 공사로 강제 철거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531일간의 투쟁 끝에 합의에 성공했다. 합의서는 2억 5천만 원 상당의 배상금 지불과 인근 지역에서의 영업 재개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처음에 제시된 합의안이 보상금 300만 원에 그쳤던 것에 비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철거민이 직접 작성한 합의서가 조인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두리반 사장 안종녀 씨도 처음부터 두리반 투쟁의 승리를 예상하지는 못했다. 안 씨는 “잘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해결이 될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덧붙여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두리반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며 “이 때문에 시행사 측에서 협상을 결정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두리반에서는 531일의 투쟁 기간 동안 음악회, 낭독회, 작가회 등의 문화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기존의 철거 현장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반면, 두리반 투쟁은 문화 운동의 성격을 띠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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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리반에서 공연 중인 인디밴드 ‘악어들’의 모습. ⓒ미디어오늘 |
작년 5월 1일에 두리반에서 열린 ‘세계 노동절 120주년 맞이 컬쳐 제공 재개발파티’의 경우 51개의 인디밴드와 수천 명의 관객이 참여했다. 일각에서는 두리반 투쟁의 승리가 사적인 이익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비판하지만, 안 씨는 이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는 “철거 문제가 개인의 승리로 국한된다 할지라도 결국 이들이 모여 권리 침해와 개발 악법과 싸워갈 때 사회 구조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리반은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홍대 인근의 상가들은 여전히 강제 철거의 위기에 놓여있다. 홍대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는 철거 위기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에 안 씨는 “두리반 투쟁 승리가 다른 철거민들에게 큰 희망과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화의 힘으로 승리의 함성을 이어나가다 두리반 투쟁 승리의 큰 원동력이 됐던 ‘문화의 힘’은 2002년 촛불 시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을 포함하는 기존의 사회 운동은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촛불 시위는 ‘촛불’이라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참여하게 했으며, 문화제들과 함께 평화적인 시위 방법으로 정착했다. 이후 용산 철거 시위에서는 ‘카페 레아’를 통해 촛불 방송국, 각종 문화제들이 진행됐다. 그리고 2009년 12월, 홍대 특유의 인디 문화와 함께 두리반 투쟁은 문화 시위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투쟁이 승리한 지금, 명동 재개발 철거 시위인 ‘카페 마리’를 중심으로 많은 시위에서 문화 시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명동 카페 마리는 지난 6월부터 철거 위기에 놓인 작은 카페이자 점거 농성장이다. 카페 마리는 세입자 단체, 자발적 지지자들의 모임인 ‘명동해방전선’, 그리고 일반인들에 의해 점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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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해방전선은 ‘명동 막개발을 훼방 놓으며, 철거민과 함께 점거하고 연대하며, 지금 여기에서 해방을 누리려는 아무나의 모임’이다. |
기자가 찾아 간 8월 13일, 카페 마리는 철거 농성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상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용역 깡패와의 랩배틀’이라는 프리스타일 랩 공연을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말복을 맞아 닭죽을 요리하고 있었다. 세입자 대책위원회 원성희 홍보부장은 사람들을 모아 마리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원 씨는 “연대하러 오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며 개발 악법과 용역 침탈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지난 6월 중순,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를 하던 학우들이 하나 둘 모여 ‘본부스탁’을 주최했다. 본부스탁은 60년대 반전 평화운동의 상징 미국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모티브로 한 락 페스티벌이다. 이틀간 열린 본부스탁에는 20팀이 넘는 학내외 밴드들이 참가했고 수백 명의 관객들이 모였다. 지난 7월 영도로 가는 희망버스에는 수많은 예술문화인들이 탑승했다. 시인들과 소설가들은 선언문을 낭독했고 가수들은 공연을 했다. 2차 희망버스에 참가했던 힙합가수 ‘시원한형’은 “최루액을 맞으면서까지 공연을 할 줄은 몰랐다”며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철거 위기에 놓인 포이동 판자촌에는 자원 활동가들이 모여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지난 8월에는 ‘벽돌 음악회’와 함께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렸다.그들은 왜 화염병이 아닌 기타를 들었나 과거 용산 철거 시위 때까지만 해도 투쟁의 방식은 극단적인 양상을 띠었다. 철거민들은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망루를 설치하고 단식 투쟁을 강행했다. 급기야 점거농성 중이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명동 카페 마리를 찾은 황진미 씨는 이에 대해 “시위가 과격해질수록 철거민들은 정서적으로 고립되고, 일반인들은 시위 현장에 참여하기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명동해방전선의 일원 중 한명인 아즈 씨는 “정치 운동이 관성화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20년 전의 격한 투쟁 방식이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공감을 사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 운동과 젊은이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 것은 ‘문화’다. 회기동 단편선 씨는 “두리반에서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홍대 라이브클럽 지도에 ‘두리반’까지 포함됐다”며 문화 시위의 파급력에 대해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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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선씨는 두리반 투쟁을 계기로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
카페 마리를 찾은 정성인 씨는 “평소에 정치적인 의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며 “즐겁게 투쟁하는 모습이 좋아 찾아왔다”고 밝혔다. 실제로 두리반과 카페 마리 등지에서 열렸던 각종 문화 행사는 투쟁의 주체를 세입자와 활동가들 뿐만 아니라 예술가, 대학생, 백수, 심지어 인디 밴드의 팬층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여기에 각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발달로 소통 방식이 진화하기 시작하면서 정치 운동에 대한 벽이 허물어졌다. 한진 중공업 고공크레인 농성의 경우 배우 김여진 씨가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연행 사실을 밝혀 수많은 네티즌들에게 충격을 던져줬다. 카페 마리의 케이 씨는 “마리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트위터를 많이 활용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지난 8월 4일 새벽 카페 마리가 용역에게 침탈당할 위기에 놓이자 시위 참가자들은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알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용역들과 대치했다.투쟁의 주체는 ‘보통 사람들’ 철거 시위 현장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은 공간 점유라는 시위 방식을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두리반 사장 안종녀 씨는 “투쟁 531일 동안 24시간 내내 두리반을 비워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며 “내가 사는 곳, 삶의 터전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카페 마리를 찾은 황진미 씨는 “생존권을 말하는 투쟁일수록 ‘삶의 투쟁’이라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황 씨는 “이 공간에 항상 사람이 있고, 노닥거리고, 노래하는 것이 삶의 투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투쟁은 일상과 함께 가는 것이다. 빨래거리가 널려있고 설거지 내기를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카페 마리의 풍경은 그 자체가 투쟁의 원동력이다. “가끔씩 이런 시위를 ‘놀자판’이라고 비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정치 운동은 진정성이 없다”고 단편선 씨는 강조했다. 카페 마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동지’다. 시위에 참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가치관과 정치색을 가지고 있지만 삶의 조건이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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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3구역 카페 마리는 ‘사랑과 연대’를 구호로 한다. 점거 농성장 내부에는 마리의 정신을 보여주는 많은 포스터들과 자보들이 있다. |
카페 마리를 찾은 정성인 씨는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투쟁에 참여했으며 또다른 참가자는 “철거민이나 나나 불안정노동자이기는 마찬가지”라는 동질감에 시위장을 찾았다. 홍대 두리반 투쟁에 승리한 안종녀 씨 역시 또 다른 철거 시위 현장을 찾고 있다. 가게 오픈 준비로 바쁜 안 씨는 “다양한 사람이 연대해준 덕에 두리반 농성이 승리로 끝났으니 나 역시 의무감을 느낀다”며 재능교육 농성장과 명동 카페 마리 등지를 오가고 있다. 이들에게 투쟁은 더 이상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다. 철거민도, 활동가도, 백수도, 꼬마 아이도 함께 하는 마리에서 서로 간의 벽은 없다. 일상이 무너진 공간에 모여 사람들은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삶의 터전을 지켜 나간다. 용역들이 침탈하고 자본이 폭력을 휘두를지언정 그들은 다함께 기타치고 노래한다. ‘이 노래의 끝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