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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8일, <고스트>상영과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압구정 CGV에서 이정진 감독을 만났다. |
지난 4월에 발표된 제64회 칸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 진출작 리스트에는 라는 제목의 한국 영화가 들어 있었다. 는 재개발 지역의 빈집에 숨어사는 남자를 소재로 한 10분 내외의 단편영화다. 연출자는 한국 감독인 다시 마(Dahci ma). 본명은 이정진이고 1987년생, 올해 나이 24살의 여성감독이다. 그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영화 관련 공부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독학’ 영화감독이다. 그는 스스로를 ‘마이너리티의 결정체’라 칭한다.학교를 박차고 나와 영화감독을 마음먹기까지이정진 감독은 학교를 그만둘 당시부터 영화감독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관둔 건데 무슨 대단한 결심이 있었겠어요”라고 웃으며 말을 시작한 그는 부모님과 자신조차 중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공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래 학생들처럼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학교가 싫고 숨이 막혀 더 이상 다닐 수 없겠다는 생각은 명확히 했어요”라며 학교를 그만두게 된 계기를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권위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는 것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오자 그 정도가 심해졌다. 그 때문인지 그는 늘 화로 가득 차 있었고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어느 날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 친구가 뒤에서 이정진 감독을 툭 치며 인사했다. 일상적 인사에 그의 반응은 한 마디, “뭐야? x!” 그도 자신의 이런 반응에 놀랐다. 이 감독은 그 때부터 학교는 자신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명확히 했다. 부모님은 극렬히 반대했지만 몇 년 후에는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해서 이내 허락했다. 그 길로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그러나 아무런 대안 없이 나온 학교였다.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사실 그래서 처음 부모님께 영화감독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많이 황당해 하셨죠.” 평소에 영화를 즐겨보던 것도, 영화를 특별하게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우연이에요. 음악을 할 수도 시를 쓴다고 할 수도,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겠죠”라고 이 감독은 당시를 회상했다. 영화감독을 꿈꾸게 되기까지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대학에서 개최되는 진보 세미나 등에 참가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그런 모임에 가면 리얼리즘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영화가 사회를 바라보는 창으로 쓰인다는 걸 알게 됐고 관심을 가지게 됐죠.” 학교를 가기 싫어 핑계로 댄 ‘영화’가 평생 걸어갈 길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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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장갑 속 진짜 고무>는 면도를 하면 규칙에 위배되고, 항상 털장갑을 끼고 다녀야 하는 사회의 이야기다. |
영화는 힘들어이정진 감독이 처음 만든 영화는 라는 작품이다. 그가 16살 때 만든 이 영화는 털을 굉장히 숭배하는 사회를 다루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면도를 하면 규칙에 위배되고, 학교에서는 털장갑을 끼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장갑을 벗고 손을 씻다가 깜박 잊고 두고 오게 된다. 영화는 사회의 규칙을 위배한 주인공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방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주인공은 당시 ‘학교’로 상징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이정진 감독 자신의 모습을 닮았다. “당시 만들 때는 몰랐지만 써놓고 보니까 내 얘기더라고요.” 이 영화는 당시 정부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제작비 300만원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나름대로는 큰 규모의 영화였는데 첫 영화를 찍고 나서 영화를 찍는 게 재미가 없어졌어요”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첫 번째 결과물은 이 감독이 예상했던 영화와는 달랐다. “내가 상상했던 장면들은 실력 좋은 감독의 영화들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내가 당시 낼 수 있는 결과물은 아니었으니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죠.” 그가 보기에 결과물은 엉망진창이었다. 기대가 와장창 깨졌다. 장소를 섭외할 때는 ‘학교도 안 다니는 게 왜 학교에서 촬영을 하려고 그러냐’는 이유로 10군데도 넘게 퇴짜를 맞았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고충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준비해 가는데 왜 같이 하는 사람은 날 믿어주지 못할까’, ‘내 의사소통 방식을 왜 알아주지 않을까’ 등 마음같지 않은 현실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영화가 ‘놀이’에서 ‘즐겁지도 않고 힘든 일’로 바뀌어 버렸다. “첫 영화 이후에 재능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 한동안 카메라를 잡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영화를 찍겠다고 주변사람들에 공언한 상태였다. 기대가 좌절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는 놀이다.”그러던 그가 다시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은 영화를 찍는 것이 놀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릴없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때였다.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를 주워와서 단상을 만들고 인형을 세워놓고 절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정진 감독은 이 장면을 자연스럽게 카메라로 찍었다. 이렇게 사이비 종교 현상을 담은 한 편의 영상물이 나왔다. “이렇게 작품 하나가 완성됐다는 게 놀랍고 즐거웠어요.”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에 영화는 같이 있는 장난감 중 하나라는 걸 느끼게 됐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그 때부터는 전혀 다른 작업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현장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작업을 하자 스스로 변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자기 의심을 반복하고 내가 부정당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경계를 확장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을 학대하는 시간들도 있고요.” 그 순간들이 분명히 즐겁지는 않았다. 이렇게 그는 고통과 긴장의 연속인 작업을 감내하고 착수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됐다.이후 찍은 두 번째 영화인 는 놀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됐다. 가족들에게 자위기구를 선물한 다음에 그 반응을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자위기구를 살 수도 없어 협찬을 받았다. 는 관객들에게 굉장히 자극적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품이다. “저에게는 가족들 안에서 금기시 됐던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물꼬를 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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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진 감독이 압구정 CGV에서 <고스트>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콤플렉스” , 이후 중증 장애인 남성이 온라인 채팅을 통해 여성을 찾는다는 , 댄스필름인 , 다섯 번째 단편인 를 제작했다. 이렇듯 학교를 그만두고 계속 영화를 찍어왔지만 아무도 그가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기성세대였다. 영화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딸을 한심해 했다.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증오해 본 적이 없어요.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문제가 더 심했다. 집에서 전혀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제작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어린나이였지만 노점상, 대리운전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언제나 돈에 시달리면서 작업을 했어요. 심지어 제작을 하는 와중에 돈이 너무 급해 교통사고 합의금을 바로 제작비로 써야하는 때도 있었죠.” 애써 제작비를 모아도 문제는 산더미였다. 그는 자신이 “한마디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중·고등학생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길거리를 나다니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그는 완전히 정체불명이었다. 당연히 학교에 있어야 할 대상이 학교 밖에 있다는 것은 너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했다. “나에게는 대단히 많은 고민과 결정이 있었는데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충고를 하니 정말 당황스럽기도 하고 상처도 많이 됐습니다.” 대리운전을 할 때도 손님들은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기술을 좀 가져보라”는 충고를 했다. 영화 현장에서 만나는 스탭들도 영화학교에 진학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일일이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직업을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게 굉장한 피로를 누적시켰다.“더 어렸을 때는 나이를 말하는 것도 너무 콤플렉스였어요.” 미팅한다고 2시간 동안 이야기를 진행한 스탭이 합류할 것처럼 얘기하다가 나이를 말하자 갑자기 일어서서 가 버린 적도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학교도 안 나오고 게다가 여자라는 이유였다. 이 감독 스스로도 자신의 조건이 여타 감독에 비해 내세울만 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대다수가 남성 스탭인 촬영 현장도 힘들었다. “학교를 나오고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과 작업을 하는데, 저는 여성이기도 하고 정규 코스를 밟은 것도 아니니 외딴 별이었던 거죠.” 현장에서 베테랑들끼리 통하는 말하기 방식을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마무리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사람들이 나를 마이너의 결정체라고 하더라고요”라며 미소를 보인 그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 때문에 항상 더 노력해 올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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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스트>는 그의 다섯 번째 단편으로, 올해 칸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
개인을 통해 사회문제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이후 영화들은 국내에서 상영되지 않았다. 영화성향이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영화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한계가 왔습니다.” 꿈을 위해서 모든 걸 다 쏟아 부었지만 빚만 생길 뿐 돈을 못 버니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힘든 점이 많았다. 20대 중반인데도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꿈’에만 투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단편 를 끝내고 나서는 어머니께서 ‘너는 영화를 한다고 10년 동안 이러고 있는데 왜 정착을 못하는 거니’라고 물어보셨어요. 나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정말 우울했죠. 이제 내 삶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텐데 그렇다고 영화를 찍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어 너무 불안했어요.” 그러던 차에 칸영화제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불이 환하게 들어온 순간이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빚이 청산되지도,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힘들고 어려웠던 10년의 세월이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칸에 초청되면서 그는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았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영화로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칸의 초청은 다가올 또 다른 10년의 막막함을 채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학교로 상징되는 사회의 억압성, 가족 안에서의 성담론, 장애인의 성욕 등의 사회문제를 그는 영화에 담았다. “이 사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그 안의 개인을 통해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보여주는 연출자이고 싶습니다.” 주변인이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주변인이기에 저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이정진 감독. ‘자기만의 시선’을 담은 다음 그의 여섯 번째 영화가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