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는 누구에게나 큰 상처가 된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인식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데다 사회적 편견으로 대중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상처는 더욱 깊다. 존재조차 대중적으로 드러내기 힘든 성소수자들이 겪는 피해가 바로 그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성폭력은 현재 우리나라 법에서 처벌 대상으로 명시돼 있지도 않다. 더욱이 커밍아웃을 하면 바로 차별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들의 성폭력 피해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음지에 숨어 고통을 겪는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외면당하는 성소수자 성폭력현행법상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속에 삽입됐을 때만 성립된다. 즉, 법에 의하면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으로만 규정돼있다. 이것은 그 외의 성폭력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문제점을 낳는다. 2010년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총 성폭력 상담 건수 1,312건 중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는 모두 51건(3.9%)이었다. 이 중 상대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는 35건, 여성인 경우는 16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동성 간에는 성폭행이 인정되지 않고 정도에 상관없이 추행으로 간주된다. 또 여성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보지 않기에 더더욱 처벌이 힘들어진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성폭행은 지난 2009년에야 인정됐다. 대법원에서 성별 결정 기준에 정신적·사회적 요소를 포함시키면서 트랜스젠더의 강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여성으로 성을 전환해 트랜스젠더로 살아온 피해자가 가해자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자 대법원은 피해자의 성을 여성으로 인정하고 가해자에게 강간 혐의를 적용시켰다. 그러나 장기간 전환된 성으로 살아온 점이 입증돼야 하는 등 피해자의 성적 자존감 훼손 등에 의해 성폭행이 인정되지 않는 한계도 있다.법망 내부에서조차 성소수자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인권위원회 법에서는 성적 지향을 두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데, 군 형법에서는 이를 처벌하고 있다”며 성소수자에 대한 규정에서 상반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했다. 실제 지난 3월 헌법재판소는 ‘계간(남성간의 성행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법 조항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동성애자인 군인이 휴가 기간에 애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도 불법이 됐다. 헌법재판소는 ‘남성이 다수인 군대라는 공동체가 건전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적 자유보다 공동체를 우위에 둬야 한다’고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게다가 법정형이 1년에서 2년으로 상향 조정돼 동성애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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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친구사이?>의 한 장면. 동성애자인 군인이 휴가 중 동성애 행위를 하면 군법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 ⓒ 오마이뉴스 |
게다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피해를 외부에 알리고 상담을 받는 것조차 어렵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실시한 온라인 상담에 따르면, 전체 500여 건의 상담 중 성폭력 상담은 50여 건 미만이었고 이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상담소 측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 피해자들만이 도움을 요청한다”며 “실제 드러나지 않은 피해는 더욱 많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서 “성소수자를 문란할 것이라고 보는 편견과 성폭력 피해에 피해자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보는 시선이 많아 피해자가 피해를 입고도 도움을 요청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성폭력 고통 더 키워성소수자에 대한 성폭력은 피해자들이 밝히기 어려워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상담 사례가 드물다. 그러나 성폭력이 이뤄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성폭력이 일어나는 사례도 있다. 한 레즈비언 여성은 다른 여성과 교제한다는 사실을 그녀를 좋아하는 남성이 알고서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또 레즈비언이 서로 연인일 경우 데이트 강간과 같은 성폭력 피해를 입기도 한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는 “남성들은 포르노로 인해 레즈비언이 남성과 여성을 둘 다 좋아할 것이라는 왜곡된 성관념을 갖는 경우가 있다”며 “가해자들은 이에 호기심으로 레즈비언을 성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고 전했다.성소수자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남들과 다른 성정체성으로 인해 배가된다. 한상희 교수는 “성폭력 피해를 당하며 자신의 성정체성을 재확인받을 때 그 고통은 엄청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끊임없이 쌓인 한은 하루아침에 털어버리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성폭력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도 크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은 피해자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은 쉽게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피해자인 동성애자들은 이성에 의한 성폭력 경험으로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고 여겨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 때 피해자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동성에게 성폭력을 당한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한국 레즈비언 상담소에서는 “레즈비언들은 여성들만 모여서 평화로운 공간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쉬운데, 기대와 다르다는 사실에 상처받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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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성소수자가 억압받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신고·수사·처벌 제대로 되지 않는 성폭력 실태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크지만 이들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기는 어렵다. 커밍아웃의 여파를 염려한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을 처벌하기는커녕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것조차 어렵게 된다.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아웃팅(성소수자의 의지에 반해 성소수자임이 드러나는 일)’ 협박을 하며 강제로 성관계를 지속해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법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성폭력이 제대로 규정돼 있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신고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친구사이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낙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폭력 신고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도 같은 이유로 그동안 접수된 성폭력 피해를 법원에 고소하지 못하고 있다.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한상희 교수는 “피해 사실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데, 이에 대한 피해자 보호 장치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며 피해자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지적했다. 한국레즈비언 상담소에서는 “심지어 수사과정에서 ‘동성 간에 어떻게 성행위가 가능하냐’며 성폭력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취급하는 경우까지 있었다”며 언성을 높였다. 더욱이 수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공개된 장소에서 성폭력의 경위를 묘사해야 하는데 성소수자들은 아웃팅에 대한 우려로 이를 꺼리게 된다.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경찰청훈령)’에서는 성적소수자가 성정체성을 밝히는 일에 대해 당사자의 의지를 최대한 존중하며 수사과정에서 경찰관에 의한 아웃팅을 제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에 성소수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마음의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상담소에서는 “처벌할 수 없기에, 고소에 대한 문의가 들어와도 선뜻 나서서 도와줄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상처는 입었으나 달래줄 이가 없다그렇다면 성소수자 성폭력 피해자들은 어디에서 고통을 달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곳은 마땅치 않다. 사회의 고정관념은 이들의 상담과 치료에 있어서도 난관으로 작용한다. 아웃팅에 대한 걱정 없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듣고 이를 감싸줄 만한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는 “피해자를 치료해야 할 의사들도 성소수자 성폭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병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한상희 교수는 “피해자들은 성정체성에 관계없이 성폭력 피해에 대한 치료를 당연히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경찰서, 학교처럼 1차적으로 피해를 신고할 수 있는 기관에서 이들에 대한 상담 안내 시스템이 전혀 구비돼 있지 않아 피해 극복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전했다.성소수자 인권상담소도 몇 군데 운영되고 있지만 성소수자의 인권 자체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성폭력 관련 상담을 하기는 쉽지 않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나 정체성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들의 성폭력 피해까지 조명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의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성폭력 상담에 중점을 두지 않아 관련 통계나 실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도 성소수자 성폭력 관련 상담은 거의 집계되지 않았다. 친구사이에서는 “성폭력 피해가 분명 존재하지만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고 피해자 스스로도 외부에 말하지 않아 피해 상황을 집계하기조차 어렵다”고 밝혔다. 실제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피해의 현황을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또 이들 상담소 대부분은 정부의 지원 없이 회원과 외부의 지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어 관련 활동을 하기 더욱 힘들다.성소수자 문제, 우리 사회도 조금씩 받아들여야성소수자는 숫자도 적고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고 사회적인 호응도 얻기 어렵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고통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상희 교수는 “개인의 요구를 국가가 못 들은 척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며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주장했다. 한 교수는 이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자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이라 강조했다.그러나 성소수자들의 성폭력이 조명받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한상희 교수는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생활지도 정책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다르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었으면 한다”며 “다양한 형태의 성별과 성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우리 사회는 남성의 성에만 관대할 뿐 다른 종류의 성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다”며 “성소수자의 성폭력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이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처할 수 있도록 사회인식과 법 체계가 개선돼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한편 현재 규정된 성폭력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은 “독일에서는 성폭력을 몸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성(性)에 따른 차별이 없고 동성 간의 성범죄도 처벌할 수 있다”며 성폭력의 범위를 넓게 인식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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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중심으로 더욱 넓은 범위의 성폭력이 규정됐으면 한다”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전문상담활동가 허복옥 씨. |
연약하고 힘없는 여성만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다. 누구나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성소수자도 물론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일반적인 성폭력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라는 문제까지 덧붙여져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인 성소수자들이 입은 상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상희 교수의 “이들의 고통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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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가 바라는 것은 무지개 색깔처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다. ‘친구사이’는 야한 옷을 입는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해 냉소적인 사회적 시선에 연대할 필요성을 느껴 슬럿워크에 참여하기도 했다. ⓒ 친구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