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핸드볼 프로팀의 잘나가는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던 혜경(김정은 분)은 위기에 처한 한국 국가대표팀의 감독대행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협회의 압력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혼녀’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이는 비단 영화 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2007년 6월, 농구 국가대표 출신인 박찬숙 씨는 우리은행 여자농구단 신임감독 1차면접에서 뚜렷한 기준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탈락했다며 국가위원회에 진정소송을 냈던 바 있다. 박찬숙 씨는 서울 숭의여중 3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된 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세계여자선수권대회 준우승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유명세를 떨쳤다. 이에 힘입어 박찬숙 씨는 1980년대 후반 대만의 백금보석과 1990년대 초반 태평양화학의 코치 겸 선수로 뛰었다. 2005년에는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경기대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기준에 의해 감독 면접에서 탈락하자 소송을 건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나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아직도 여성지도자가 새로이 부임했다는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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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혜경은 지도자로서 활약할 기회를 박탈당하다시피한다. |
예전에는 고정관념이 지도자의 꿈을 막아
국가대표 출신 여성 선수들이 모여 친목 및 지위 향상 등을 도모하는 한국여성스포츠회에 그 까닭을 물어 봤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성 선수가 지도자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성 선수들의 친목 및 지위 향상 등을 도모하는 한국여성스포츠회 강영신 전무(배드민턴 국가대표 출신)는 과거엔 박찬숙 씨처럼 지도자에 지원한 사례 자체가 거의 없었다고 답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잔존했던 고정관념들이 ‘결혼=은퇴’라는 공식을 낳아 여성 선수들이 결혼 후 육아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강 전무는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지도자를 꿈꾼다 해도 기술이나 전술의 변화 등을 따라잡지 못해 꿈을 접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여성임원 부족, 넘어야 할 벽 최근에는 육아와 지도자를 병행할 수 있다는 관념이 확산되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은퇴선수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지난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 지도자 자격으로 참가한 여성은 단 6명에 불과했다. 또한 현재 농구, 배구 종목 여성 프로스포츠 11개 팀 감독은 모두 남성이다. 11개 팀 감독 및 코치 27명 중 여성은 우리은행 조혜진 코치 1명뿐이다. 트레이너까지 포함한 43명 중 여성은 3명(7%)에 불과하며 반면에 매니저, 의무 같은 지원 스텝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다. 여성 예비 지도자들의 데뷔가 이토록 험난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여성스포츠회에서 지도자 육성을 맡고 있는 정현숙 씨(탁구 국가대표 출신)는 여성임원 부족을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했다. 현재 한국여성스포츠회에는 총 50여 개에 달하는 종목의 선수들이 소속돼 있다. 하지만 2004년까지 이 중에서 각 종목 협회에서 임원을 맡고 있던 선수들은 전 종목을 통틀어 열 명도 되지 않는다. 다섯 종목 중에서 한 명의 여성 임원만이 나온 셈이다. 대한체육회나 대한올림픽위원회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여성 임원 비율이 10%에도 못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감독선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성임원의 비율이 적고 스포츠계 전반에 여성 감독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각 협회가 여성을 감독으로 의결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합의는 이끌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어 2005년 한국여성스포츠회에 부임한 이덕분 회장은 우선 한국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여성 임원을 30% 이상 확충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 2005년에 20% 여성 배정이란 조건부 합의를 이끌어 냈다. 장기적으로 여성임원이 늘어날 것이며 이후 협회에서도 남녀가 보다 공정한 입장에서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평가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다. 합의가 이뤄진지 3년이 됐지만 아직 종목별로 여성이 진출한 편차가 크다. 탁구협회의 경우엔 여성 임원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원래 여성의 비중이 적고 세가 미약했던 수영, 레슬링 등의 종목들에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상황이 개선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당장 임원의 20%를 확충하려 해도 그 자리를 맡을 여성 수 자체가 부족한 종목들도 있다. 사격의 경우엔 아직 여성임원이 아예 없다. 그리고 20%의 임원 역시 여성의 입장을 보다 강화시켜 줄 수는 있으나 아직 정족수(50%)에 미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선 완전한 타개책이라고 보긴 힘들다. 프로가 아닌, 생활스포츠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도자들까지 생각하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경기도에서 2007년 지도자 자격을 취득한 여성지도자는 전체의 12.1%에 불과하다. 우리 생활 주위에서도 여성지도자가 체육을 가르치는 장면은 ‘낯선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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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압감을 느끼는 새내기 여성 지도자들
한국여성스포츠회의 정현숙 씨는 “이제 지도자로서 첫걸음을 떼게 될 ‘예비 여성 지도자’들에겐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른다”고 말했다. 이들이 각 협회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을 시엔 여성의 지도자로서 자질에 대한 편견이 더 강화돼 다시 여성 지도자가 선출되리란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 정도의 임원 비율로는 이러한 편견을 뒤집기 힘들다. 즉 여성지도자들은 개인적인 성과 여부를 떠나 전체 여성 스포츠 종사자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활체육에 미치는 영향까지 감안해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현실에서 성취하기 위해, 여성 지도자들에게는 여전히 몇 배의 땀과 눈물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