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흐름은 이제 안방극장에까지 흘러들었다. 수현과 지우가 두 손을 모아 타이 어로 “싸와티~”라 인사를 나누더니(MBC ‘개와 늑대의 시간’), 베트남 전통 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누엔 진주가 우리들 앞에서 밝게 웃는다(SBS ‘황금신부’). 시청자들은 연변 처녀 양국화의 엉뚱함에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KBS ‘열아홉 순정’) 일본 나가노에서 펼쳐지는 하나와 윤서의 가슴 아픈 사랑에 눈물짓기도 한다(SBS ‘천국의 나무’). 한국의 드라마는 국경을 넘어 아시아를 품기 시작했다. 타이 후아힌 해변을 안방극장에서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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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에 방영된 SBS ‘천국의 나무’는 일본 올 로케를 시도해 화제를 낳았다. |
아시아 국가들의 풍경을 로케 형식으로 담아낸 드라마들은 최근 몇 년 간 꾸준한 증가 추세에 있다. MBC ‘신돈’(2005, 중국), ‘궁’(2006, 타이), ‘에어시티’(2007, 홍콩), ‘히트’(2007, 홍콩), ‘겨울새’(2007, 중국), SBS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2007, 캄보디아) 등은 극의 1~2회분 정도를 아시아 각국에서 로케로 촬영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드라마 전반에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SBS ‘천국의 나무’(2006, 일본)와 MBC ‘개와 늑대의 시간’(2007, 타이)이다. ‘천국의 나무’는 법적 남매 관계인 한국인 소년 윤서(이완 분)와 일본인 소녀 하나(박신혜 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는데, 일본 배우들을 전면적으로 캐스팅하고 드라마 전편을 일본에서 촬영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로 방영 당시 화제가 됐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타이는 주인공 수현(이준기 분)과 지우(남상미 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둘의 비극적인 운명이 시작된 곳으로 설정돼 있다. 아시아 로케 촬영이 증가하게 된 배경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 박광현 프로듀서(사과나무픽쳐스)는 “드라마의 주 수출국이 아시아인데, 해당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드라마를 촬영한다고 하면 많은 관심을 보인다”며 최근 한국 드라마들이 한류 붐에 힘입어 아시아 수출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드라마 속에 이국적인 풍경을 담아내려는 제작진의 의도 또한 아시아 로케를 추진하는 이유다. 박 프로듀서는 “드라마를 통해서 다른 나라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국내 시청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며 “(유럽이나 미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아시아 국가들로 로케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베트남의 라이따이한과는 한 지붕 아래 오손도손 아시아 국가들의 풍경을 담아내는 차원을 넘어 아시아인들을 드라마 전면에 내세우는 드라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연변 출신의 조선족 여성 양국화(구혜선 분)가 한국에서 살아가며 겪는 에피소드를 그린 KBS ‘열아홉 순정’(2006), 라이따이한 여성 누엔 진주(이영아 분)가 한국 사회에서 홀로 서는 과정을 담은 SBS ‘황금신부’(2007) 등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단편 드라마로는 SBS ‘하노이의 신부’(2005), ‘깜근이 엄마’(2006) 등이 있다. KBS ‘꽃 찾으러 왔단다’(2007), ‘미우나 고우나’(2007) 등은 그리 큰 비중은 아니나 아시아인들이 조연으로 등장한 드라마다. 이들 드라마는 국제결혼 가정이나 혼혈인 등 ‘다문화사회’로 변화해가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동시에 외국인을 구성원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혈통주의에 의문을 던진다. ‘황금신부’ 조연출 김효언 씨는 “베트남 여성이 한국 가정에 정착해 가족들과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가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은 ‘다문화사회’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진주라는 베트남 여성이 가족의 일원이 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려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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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혈인 문제를 다룬 SBS 추석특집극 ‘깜근이 엄마’의 시청자 게시판. ‘깜근이 엄마’는 필리핀계 혼혈인 소년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을 사실적으로 그려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
이러한 드라마들은 시청자들이 아시아 국가에 관심을 갖고 간접적으로나마 아시아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디씨인사이드 ‘개와 늑대의 시간’ 갤러리에서 닉네임 ‘단서리’를 사용하는 한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면서 타이라는 나라가 가깝게 느껴졌고 꼭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아장’이라는 닉네임의 시청자는 “타이가 불교국가라서 그런지 낯설진 않았지만 좀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며 “한국과는 다른 타이 식 불교 사원과 타이 음식 등 타이의 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도 중요한 의의로 꼽을 수 있다. 필리핀계 혼혈아가 겪는 인종차별과 순혈주의 문제를 다룬 ‘깜근이 엄마’는 2부작으로 구성된 단편드라마였음에도 방영 직후 시청자 게시판에 249건의 글이 올라오는 등 시청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황금신부’는 주인공 누엔 진주(이영아 분)를 통해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한국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라이따이한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공식 웹사이트의 게시판에는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의 사연이 줄을 잇는 등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 속 아시아와 아시아인들의 묘사가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들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드라마 속 아시아 국가들의 모습이 사실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황금신부’의 경우 주인공이 ‘누엔(Nguyen)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나 ‘Nguyen’의 정확한 발음은 ‘응우엔’에 가깝다. ‘열아홉 순정’에서 양국화가 자주 사용하는 “으라차차”라는 말은 연변 조선족 사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며, 19세의 나이에 결혼하는 것도 연변 조선족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설정이다. 드라마 제작진 역시 현지 문화와 드라마 속 설정이 충돌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박광현 프로듀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마오(최재성 분)가 수현 어머니(김정난 분)를 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타이에서는 경찰이나 검사 등이 괴한의 총에 맞아 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장면이 타이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느껴질 것”이라고 털어놓았다.“상상 속에서 그려진 이미지들… 우리의 현실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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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늑대의 시간’ 제작사인 사과나무픽쳐스 사무실. ‘개늑시’ 제작진은 촬영 시작 전에 타이를 방문해 현지 문화를 철저히 조사하고 대본을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 |
드라마 속 아시아인들의 설정이 지나치게 왜곡되고 희화화돼 해당 국가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황금신부’에서 진주가 한국 물정을 모르고 순박하게만 그려진 데 대해 김효언 씨는 “진주 스스로가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드라마 초반에는 순진하게 행동하고 실수도 많이 하도록 설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김현희(한국명, 29세) 씨는 “진주가 백화점 시식코너에서 ‘엄마 빨리 와 어서 먹어’ 라고 하면서 공짜를 밝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베트남 여성들은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공짜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지적했다. 역시 베트남 출신으로 한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김은주(한국명, 31세) 씨는 “진주가 전자렌지에서 음식을 조리하다가 불을 낸 설정은 너무 억지스럽다. 베트남 여성을 비하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열아홉 순정’ 또한 양국화를 통해 묘사된 조선족의 모습이 지나치게 왜곡돼 있다는 지적이 있다. 조선족 칼럼니스트 김범송 씨는 “연변은 중국 내 한류의 진원지로, 연변의 조선족들은 한국의 사회 모습이나 최근 유행하는 가요 등 한국 사정에 매우 밝다. 그런데도 드라마에서는 양국화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자동차 속 GPS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는 등 한국 사회에 무지한 사람으로 그려졌다”며 “주변의 조선족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하고 답답해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우 시청자들은 아시아 국가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고, 해당 국가 사람들은 반감을 갖게 될 여지가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이들 드라마 속 아시아는 우리의 시선에서 타자화된 존재들이다. 그들 나라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정서나 가치관, 문화 등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우리식으로 재단된 외국을 드라마에 담아내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워질 것”이라 지적했다. 김범송 씨 역시 “‘열아홉 순정’ 속 조선족의 모습은 한국인의 상상 속 이미지일 뿐”이라며 “한국인들에게는 조선족의 이미지를 잘못 각인시키고 조선족들로부터는 외면받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지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존중의 자세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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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의 드라마들이 한국인들에게는 아시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아시아인들에게는 공감을 가능하게 하려면 어떤 노력이 요구될까. 우선 드라마 제작진들이 현지 문화를 철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광현 프로듀서는 “드라마를 제작하기 전에 현지에 방문해 현지 문화를 철저히 조사하고 제작을 준비해야 한다. 시나리오 속 인물의 이름, 대사, 행동 등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다듬어 현지 문화를 사실적으로 담아내야 현지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현희 씨 역시 “(‘황금신부’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좀 더 연구해서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아시아와 아시아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해서도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 한국태국학회장 김홍구 교수(부산외대 태국어과)는 “(일부 드라마들이) 우리의 경제적 우월감에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과거 서구가 가졌던 오리엔탈리즘을 우리 역시 갖고 있는 것”이라 지적했다. 김 교수는 “토끼를 보려면 토끼 눈으로 봐야 하는데, 우리는 이미 코끼리의 눈을 갖고 있다”며 아시아를 바라보는 데서 드러나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를 품는 한국의 드라마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범송 씨는 “아시아인들이 등장하는 최근의 드라마들은 이들을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취지를 갖고 있다”며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문제는 이런 취지를 어떻게 잘 살려낼 것인가이다. 김헌식 씨는 “드라마가 외국인과 외국인 문제를 다룬다는 것 자체에만 주목하기 보다는, 이 드라마들이 외국인을 어떤 태도로 묘사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드라마가 아시아 속에서 진정한 ‘한류’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