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도 5.18은 현재진행형

올해도 5월 18일이 다가오면서, 학내에는 5.18 자보와 광주 순례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져 있었다.그러나 자보를 보는 학우도 일부, 실제로 순례단을 꾸려 광주에 간 학우도 일부다.어느 보수 언론의 선정적인 제목처럼 광주의 5.18은 잊혀져 가는 것일까.광주에서는 5월의 민중항쟁이 어떻게 기억되어 살아 움직이는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살펴보기 위해 5월 17,8일간 광주에 다녀왔다.

올해도 5월 18일이 다가오면서, 학내에는 5.18 자보와 광주 순례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보를 보는 학우도 일부, 실제로 순례단을 꾸려 광주에 간 학우도 일부다. 어느 보수 언론의 선정적인 제목처럼 광주의 5.18은 잊혀져 가는 것일까? 광주에서는 5월의 민중항쟁이 어떻게 기억되어 살아 움직이는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살펴보기 위해 5월 17,8일간 광주에 다녀왔다. 잊지 못할 5.18photo1 “TV에서 보이는 참혹한 모습이 진짜여. 군인들이 때리고 쏘고 하는디 장난이 아니여. 처음엔 죄 없는 우리 잡는다고 군인들한테 막 대들었는디 나중에 학생 통해서 처음으로 전두환 이름이랑 그놈이 한 짓을 알게 된거제.” 국립 5.18 묘지의 어느 묘 앞에 앉아있는 유가족분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바람은 높아져갔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을 기획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5월 18일 전남대 대학생 200여 명이 경찰과 충돌을 일으켰고, 일반시민을 향한 무차별 공격으로 경찰의 무력행동이 번지자 시민들은 분노하여 급기야 21일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시민군은 전 시내를 접수하여 한 때 시민자치 공동체를 형성하였지만 2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5.18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200여명의 사망자 등 겉으로 보기에 5.18민중항쟁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의 본보기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5.18항쟁의 계승을 위한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5.18민중항쟁은 승리의 역사로 기억되어 오고 있다.공권력 안에 박제화된 구묘역 vs 5.18 정신 살아 숨쉬는 신묘역photo2 광주 망월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 5.18묘지는 면적 5만여 평의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민주의 문, 민주광장, 추념문, 참배광장을 차례로 지나가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리는데 뒤로는 그 유명한 5.18민중항쟁 추모탑이 높다랗게 서있다. 국립묘지를 찾은 5월 17일, 드넓은 참배광장은 다음날 있을 5.18 행사준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과 대통령의 5.18기념식 참여, 국립묘지 방문은 이제 하나의 관례로 자리 잡히면서 국립 5.18 묘지는 정치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추모탑을 지나면 300여 평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곳에는 5.18 당시 희생자들이 죽은 순서로 뉘어져 있다. 깔끔하고 정확히 구획되어 있는 묘역은 5.18 관련 뉴스의 배경화면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날도 몇 차례에 걸쳐 각 방송국 취재팀의 촬영이 이루어졌다. 이제 이 곳 국립묘역은 5.18의 저항정신이 살아 숨쉬기 보다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박제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photo3 반면, 5.18 국립 묘지의 왼쪽 한 편에 존재하는 구묘역은 신묘역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묘역에는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당했던 분들이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으나 97년 완공된 국립 5.18 묘지의 신묘역으로 이장되어 갔다. 지금은 5.18민중항쟁 이외에 진행된 여러 투쟁 중에 숨을 거둔 열사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 신묘역의 정제된 모습과는 달리 구묘역의 주변 나무에는 수많은 플랜카드와 깃발들이 달려 있었다. 크게 노동해방, 자주적인 민족 통일, 반미로 대표되는 구호들이 적혀 있었으며 이 것들 모두가 5.18정신으로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열사분들의 묘 하나하나에는 자세한 활동 내용과 때때로 그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음식과 종이학등이 놓여져 있었다. 한때 민주화의 순례지로 여겨지던 이 곳은 여전히 그 뜻을 기리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다. 17일 이날도 많은 대학생들이 열사들의 묘를 하나하나씩 찾아가며 그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윤창희씨는 “깔끔하기는 신묘역이 훨씬 낫지만 느낌이 와 닿지 않는다. 구묘역 이겨가 제대로인 것 같고 5.18 희생자들의 이미지와도 어울린다. 구묘역에는 훼손된 부분이 꽤 있는 것 같던데 여기 관리도 충실히 해야할 것이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5.18은 아직도 진행중이틀 동안 만난 광주시민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5.18의 청산의 미숙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5.18 민중항쟁 부상자회 이사 김정수씨는 “5.18은 진행중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생 영령과 그 후손자의 입장에선 달라진 게 없다. 가시적인 기념물과 행사만 횡행할 뿐 내용이 비어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5.18을 진압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은 전두환.노태우의 훈장이 아직도 취소.박탈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7년 제정된 5·18특별법으로 취소된 훈장은 단 두개뿐이다. 자진해서 훈장을 반납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뿐더러 사죄 한마디 없는 상황에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해 보인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과 함께 실종된 주검과 관련해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해 주검을 매장했을지 모른다는 의혹, 최초로 발포 명령을 내렸던 책임자 규명 미국의 진압부대 작전 통제권한으로 인한 개입 문제 등 미해결 된 문제는 산재해 있다. 평소에도 국립 5.18 묘지를 자주 찾아온다는 한 시민은 “번지르르하게 기념비 세워놓고 일년에 한번 양복입은 사람들 와주면 뭣한다요. 지금도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훈장 달고 버젓이 살아댕긴디. 인자 화해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들 그런디 화해는 혼자하간. 사죄 한마디 없고 가해자 진상규명도 확실치 않은디 누구랑 화해한단 말이요”라고 성토했다. 광주의 전야제는 온통 ‘반미! 자주통일! ‘ photo4 5월 17일 예상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광주 시내 도청 앞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야제의 일정이 어그러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그램 일정이 약간 수정된 것 이외에는 거센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 덕분에 무사히 전야제가 치루어졌다. 본격적인 무대행사 전에 청소년 댄스팀 공연이 꾸려졌다. 공연을 지켜보던 시민은 “시대가 변했는데 문화제가 굳이 엄숙하고 숙연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며 “이렇게라도 청소년에게 5.18이 자연스럽게 다가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댄스팀의 리더인 주희연(밀리오레 공연팀. 고3)은 “비록 섭외를 통해 이 자리에 서게 됐지만 광주사람으로서 5.18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며 공연 취지를 밝혔다. 본격적인 공연은 오월풍물단의 길놀이, 오월영령의 위패 모심굿, 5.18 전야를 알리는 북소리와 노래패와 춤패가 꾸리는 무대로 구성되었다. 공연을 통해 이야기 되어지는 것은 크게 두가지였다. 자주적인 민족 통일과 광주에 주둔하게 될 패트리어트 미군기지 철수와 같은 반미표방이 그것이다. 마지막 공연을 장식한 노래패 ‘우리나라’는 노래 가사를 통해 최근 불거진 독도문제를 언급하며 반일감정도 살짝 내비췄는데, 시민들의 호응이 컸다. 5.18 전야제의 기획단이자 민중연대 문예국장인 양정화씨는 “문화제가 단지 5월을 기리고 기념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며 “현존하는 사회 부조리,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5.18 정신을 계승해야 하며, 문제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기 때문에 반미가 중점이 되어야 한다”고 문화제의 취지를 밝혔다. 전남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부회장 최유진씨는 5.18 정신 계승에 대해 “반미, 조국통일이 그것의 핵심이다”고 말하며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이 부족한게 사실이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전야제의 길거리에서 만난 조대신문 기자 이유진씨는 “언론사에 소속해 있다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대부분의 대학생이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게 사실이다”며 비슷한 의견을 늘어놓았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축제를 만끽하는 많은 사람과 셔터를 눌러대는 몇몇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도로와 보도를 경계로 확연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일상적 시.공간 속에서 5.18의 현주소 광주에서 5.18 민중 항쟁에 대한 정보와 문헌/영상 자료와 기념비 등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은 크게 국립 5.18 묘지의 추모관, 5.18 자유 공원, 5.18 기념 문화 센터등으로 비교적 시민들의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 문화 센터에는 DB 구축을 통한 열람실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인 자료실이 있다. 자료의 종류도 다양하며 현재, 안내와 함께 개인적으로 열람이 가능하다. 이 자료실 말고도 기념 문화 센터에는 당시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자료실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유품들은 곧 문을 열게 될 도청의 5.18기념관과 국 5.18묘지의 추모관으로 분산되어 들어갈 예정이다. 기념 문화 센터의 한 관계자는 “수집된 자료를 한 곳에 모으지 않고 다 분산시킨다는 언론의 비판이 거센데 이곳은 애초에 다른 자료관에 넘겨지기 이전에 그것들 보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며 “시민들이 손쉽게 원하는 자료를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료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 보다는 지역사회 곳곳에 분포되어야 있어야 한다고”고 말했다. 덧붙여 DB 구축과 인터넷 통합의 부재는 아쉬운 점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남대를 찾은 18일은 마침 학교가 5.18 기념관을 새로 선 보이는 날이었다. 이 곳은 5.18항쟁을 정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전남대인들이 함께 걸었던 발자취를 기억하고 연구의 성과와 기념물들을 보관, 열람, 공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첨단을 자랑할 만한 영상 자료와 각각의 투쟁 당시 전남대의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는 유품 및 직접적인 자료, 열람 가능한 연구 성과물들은 전남대인과 시민들의 올바른 5.18 정신 계승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전남대 정문에 걸려 있는 ‘오월을 안고, 세계로’라는 슬로건. 5월 항쟁에서 전남대인이 보여주었던 저항정신을 현재의 전남대가 진취적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전남대와 광주를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 역사에 존재해 왔던 수많은 투쟁의 순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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