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象 : 여휴를 이용하는 두 사람異夢 Part1. 여휴, 지금 이대로도 좋긴 하지만… – 여휴에씨의 이야기내년이면 3학년, 속칭 고학번의 반열에 진입을 앞둔 여휴에(21)씨. 그녀는 요즘 연일 이어지는 과제와 퀴즈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어제 밤에도 서투르기만 한 엑셀과 씨름하느라 꼬박 밤을 샌 상태다. 다크서클은 눈 아래 깊숙이 내려와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기 민망한 휴에씨, 잠시 쉬며 눈도 붙일 겸 여느 공강 때처럼 여휴로 향한다. 힘없이 쥔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형형색색의 음식점 전단지가 나뒹구는 바닥과 정리되지 않은 익숙한 소파가 눈앞에 펼쳐진다.(발에 채는 전단지 몇 장을 모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휴, 오늘도 어지럽네요. 지난 학기엔 제법 깨끗했는데 요새 부쩍 더러워졌단 말이야. 에이 왔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학교 안에 이 정도로 편히 쉴 수 있는 데가 어디 있겠어요.(소파를 향해 다섯 걸음 걸어가 발을 아프게 감싸고 있던 구두를 살짝 벗고 편한 자세로 올라앉는다)에고, 편하다. 근데 여기 청소는 누가 하는 걸까요? 여성주의 단위에서 하는 건가, 학생회에서 하는 건가? 봉사 장학생 인정은 받고 있나? 그러고 보니 봉사 장학생으로 인정받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고 들은 것도 같고. 그래도 이렇게 관리가 잘 안되는 건 좀 별론데…(주위를 둘러보니 큰 소리로 수다 떠는 몇몇 여학생들)그런데 옆 사람들 조금 시끄럽네요. 다른 곳보다 편하게 수다 떨 수 있는 곳인 건 사실이지만. 가끔은 여휴가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배제되기 쉬운 여성의 공간 확보라는 의미의 정치성, 그런 의미를 잃어가는 느낌이 들곤 해요. 오로지 수다를 위한 공간으로 변질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가방에서 음료수캔을 꺼내 따서 한 모금 마신다)사실 누구나 정치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를 포함해 여기 오는 여학우들 중 몇 명이나 과연 여휴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봤을까 회의가 드는거죠. 여자들이 맘놓고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단지 여휴를 파우더룸과 다를 바 없는 공간, 혹은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 정도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여휴 이용자들이 그냥 별 생각 없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은 처음 여휴를 획득할 때의 고민들을 바래게 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들어요.(일어나 흡연실로 간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후- 역시 밤샌 다음날 피는 담배 한 개비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 맘 놓고 담배 필 수 있는 곳도 여기밖에 없죠. 참, 내가 여휴에서 편히 담배 핀다니까 어떤 오빠는 이런 말도 하더라구요. 왜 거기서 숨어서 피냐고, 여성의 흡연도 떳떳한 거니까 어디서나 당당히 피라고 말이에요. 워낙 귀가 얇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학내의 모든 공간을 여성친화적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좁은 여휴보다 넓디넓은 학교 어느 곳에서나 당당히 담배를 필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비약일 수도 있지만 여휴처럼 ‘안전한’ 공간 속에서 안심하다 보면 분리된 채 익숙해져 더 큰 공간으로의 확장에 무신경해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빈 캔 위에 담뱃불을 비벼 끄며)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담배 피고플 때 제일 먼저 여휴를 떠올리는 나지만. 여성 친화적 공간을 전면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표 설정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공략이 필요하다 해도 지금 당장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건 부인할 수 없잖아요. 담배 피는 나를 바라보는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 여휴를 찾는 나를 마냥 탓할 수 없는 거겠죠. (졸린 듯 눈 비빈다. 하품이 막 나온다)여휴를 애용하는 사람으로서 여휴의 존재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지금의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점도 그렇고, 정치성의 측면에서 그냥 여기에 안주하기엔 찝찝하단 거죠. 아 말을 많이 했더니 너무 졸리네요.(시계 알람을 맞춰 놓고 잠든다) 異夢 Part2. 온전한 휴식공간으로 남아야 될 여휴 – 목소리씨의 이야기점심을 먹은 뒤 2시 반까지 공강인 목소리(20)씨.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엔 식사 후 밀려드는 나른함에 짓눌릴 것만 같다. 친구들에게 연락하기도 살짝 귀찮은 이럴 때 가장 아늑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휴로 향한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만화책을 읽을까 따끈한 온돌방에 몸을 좀 뉘어볼까 생각하는 새 여휴에 다다랐다. 학관 여휴는 대개 모든 시간에 그렇듯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득한 사람들 속에 앉을 만한 자리를 발견한 소리씨, 천천히 자리로 향한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는다)자꾸 트림이 나오는 게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그나마 여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공강에 과방 놔두고 왜 굳이 여휴를 찾았냐구요? 왜냐면 과방보다 여기가 훨씬 더 편하거든요. 아무 긴장 없이 앉거나 누워 있을 수도 있고, 밥 먹기 애매할 때 남 눈치 안보고 혼자 뭐 먹기도 좋고, 잠도 잘 수 있고. 학교 안에서 여기가 제일 편한 것 같아요. (흡연구역을 바라본다. 여학우 두 명이 담배를 피고 있다.)혼자서 먹고 쉬는 건 과방에서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여휴가 진정으로 필요한 공간인가’ 하는 그런 질문은 여러 번 받아 봤어요. 그런데 그나마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이란 공간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양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소수의 위치를 갖고 있는 거 아닐까요. 학내의 많은 공간들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지. 여자 흡연자에 대한 호기심과 일종의 위협이 뒤섞인 시선의 압력이란. 거기에 실질적으로 빈번한 물리적 폭력에 우린 숨 쉴 공간이 필요한 걸요. 여휴의 존재란 어찌 보면 여학우들에게 마지막 보루일지도 몰라요. (책꽂이에서 만화책을 하나 꺼내든다.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뒤적인다)여휴의 존재에 대해 순수하게 궁금증을 품는 사람들 말고, 자기 기준에서 별로 필요성이 안 보이니까, 불편해도 대충 참고 살라는 은근한 압력을 주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사실 아무리 구구절절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요. 참, 그리고 여학생만을 위한 여휴라는 공간이 왜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앞에서도 말했듯 거꾸로 지금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는 공간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요. (졸린 듯 하품을 하며)아 자꾸 나른해지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대운동장이랑 기숙사 운동장 등을 생각해 보세요. 며칠 전 밤엔 기숙사에 가다가 새삼 놀란 적이 있어요. 환하게 불 켜진 운동장 안에 모여 축구를 하고, 족구를 하고,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다 남자인 거에요. 단 두 명 운동장 바깥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여자들이 보이긴 했지만요. 그리고 대운동장이나 학교 안에 공터 같은 곳을 보면 항상 그 곳에서 뭔가 운동 경기나 팩차기를 하는 이들은 대개 남자들이잖아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낸다. 며칠 전 왼쪽 뺨에 난 뾰루지 하나가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물론 일부러 ‘여기는 우리 공간이야’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게 더 무섭지 않아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암묵적으로 점유돼 버리는 공간. 공간의 물리적 크기로 대응하는 게 저열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여학우가 그나마 온전히 쉴 수 있는 여휴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아요.(시계를 본다. 아직 다음 수업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여휴가 너무 수다의 공간으로만 변질되는 것 아니냐, 본래의 의도를 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계속 말하는 거지만 우리들만의 얘기를 풀어낼 장소가 필요해요. 남자들은 피씨방이든 술집이든 당구장이든 항상 어딘가에 모이잖아요. 여휴는 여학우 모임의 중요한 장소로도 이용될 수 있구요. (기지개를 쭉 편다)또, 여휴가 단지 ‘쉼’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에요. 특히나 생리할 때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여휴들이 관리 문제에 있어 개선돼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 알아요. 그런 건 제대로 개선돼 가야겠죠. 여휴라는 공간이 남휴 없음의 억울함을 유발시키는, 여/남 대립의 상징적 장소가 아니라 여성의 자아 휴식 공간이자 삶에 편안함과 그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