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만 작지는 않은 그들

또 한번 선거의 계절이 다가온다.87년 대통령 선거(이하 대선)에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대선은 ‘정치의 꽃’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정당, 정치인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일반인의 뇌리에 대선은 당선자와 그의 강력했던 라이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그런데 역대 대선 출마자들 중에는 당선권과는 멀었지만 나름의 의미를 보여 준 군소정당과 군소후보들이 있었다.

또 한번 선거의 계절이 다가온다. 87년 대통령 선거(이하 대선)에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대선은 ‘정치의 꽃’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정당, 정치인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 일반인의 뇌리에 대선은 당선자와 그의 강력했던 라이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대 대선 출마자들 중에는 당선권과는 멀었지만 나름의 의미를 보여 준 군소정당과 군소후보들이 있었다. 메이저급 후보들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한 역대 대선 군소후보에는 어떤 이들이 있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재야, 진보 세력의 결집을 내건 후보들을 중심으로 군소후보들을 되짚어 보도록 하자.민중세력의 독자세력화를 바란 재야운동가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87년 말 13대 대선은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과 노태우 후보, 4인의 대결 구도였다. 당연히 주요 보도는 유력 후보 4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편 진보진영 측에서 출마한 재야운동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민중춤과 사물놀이 등을 보여주며 대학가 집회현장 같은 유세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백 후보는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두고 김대중 후보에게 진보 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했다. 애초 백 후보의 출마는 직선제 도입으로 국민들의 대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민중세력 정치화의 교두보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따랐다. 또 다른 군소후보였던 홍숙자 씨 역시 선거를 앞두고 사퇴, 87년 대선은 최종적으로 5인의 후보가 경쟁을 벌였다. 1992년 말 백기완 씨는 다시 한번 민중후보로 14대 대선에 출마한다. 당시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양자 구도 속에 정주영, 박찬종 씨 등이 주요한 후보로 인식됐다. 이들 외에 기독교 계층의 지지를 모으려 한 김옥선 씨, ‘완벽한 법치주의의 실현’을 내건 정의당의 이병호 씨가 나왔다. 그리고 이종찬 당시 의원이 새한국당이라는 신당을 만들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백기완 씨는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범민주 단일후보로 밀자는 재야 주류 세력에 반대한 민중세력의 독자후보로 추대됐다. 백 후보는 ‘기존 정당이 아닌 민중세력의 독자적인 세력화’를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14대 대선에서도 재야의 주류인 전국연합이 범민주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김대중 후보 지지로 기울어져 있어 재야의 완벽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와 민주노동당의 창당김대중과 이회창의 대결 속에 ‘리틀 박정희’전략을 내세운 이인제 후보의 돌풍이 주목된 1997년 15대 대선에는 이들 외에 공화당의 허경영, 바른나라정치연합의 김한식 목사, 한국당 신정일 씨 등이 출마했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에서 권영길 후보가 출마했다.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씨는 국민승리21 준비위 발족식에서 대선후보로 추대됐다. 권 후보는 ‘대선 출마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세력 건설의 첫걸음’이라는 뜻을 밝혔다. 국민승리21의 출범과 당 차원의 대선 출마는 과거에 민중세력에서 독자후보가 나오던 때에 비하면 진보 진영의 세력화가 어느 정도 이뤄졌음을 의미했다. 일각에선 김대중 후보에게 돌아갈 표의 분열을 부른다는 시각도 있었지만 권 후보는 ‘정권 교체가 중요하지만 DJ로의 교체는 의미 없다’며 ‘결코 야권 지지층과 우리 지지층이 겹치지 않는다’고 생각을 밝혔다. 당시 선거 과정에서 언론 보도가 주요 후보들에게만 편중돼 있다는 군소 후보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그나마 권 후보는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미는 유일한 진보진영의 대변인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권 후보는 개표 결과 군소 후보 중 유일하게 1%를 넘는 지지를 받는 성과를 올렸다. 국민승리21의 약진에 이어 98년 말에는 14대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를 추대했던 이들이 모여 만든 또 다른 진보정당인 청년진보당이 창당됐다. 차츰 정치세력화를 이뤄가던 국민승리21은 2000년 ‘민주노동당’으로 당명을 정하고 50년대 조봉암의 진보당에서 이어져 온 진보정당의 적자임을 자임하며 공식 출범했다.진보 세력의 본격적인 선거 참여가 사회당 창당까지 끌어내이러한 분위기를 이어 2002년에는 진보 정치 세력의 본격적인 선거 참여가 이뤄졌다. 16대 대선에는 이회창, 노무현의 양강 구도에 이한동 전 신한국당 총재, 장세동, 김길수 씨 등이 출마했다. 민주노동당 후보로 97년에 이어 대선에 재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TV토론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제3후보로 발돋움했다. 또 청년진보당에서 이어진 사회당의 김영규 대표가 대선후보로 출마했다. 진보 세력 뿐 아니라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도 기성 정치권 내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것으로 분류됐다. 그 밖에도 본격적인 진보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존 보수정당과는 뚜렷이 다른 정책노선을 가진 개혁당도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민주노동당은 당해 년도 지방선거에서 8%이상의 지지를 받으며 더 이상 ‘군소’로 부르기엔 그 크기가 커버린, 실질적인 제3당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한국노총 세력은 후보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선을 앞두고 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한편 본격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한 사회당은 민노당이 진보진영에 속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은 아니라고 비판했다. 사회당은 한국 유일의 좌파정당을 표방하며 진보 세력에 호소했다. 결국과적으로 노무현, 권영길, 김영규 후보의 득표율 합은 52%를 상회했다. 이로써 16대 대선은 과거보다 진보 성향의 정치인, 정당이 많은 지지를 얻으며 사회적인 지지 분위기와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확실히 끌어냈다고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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