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에 선 북한의 몸부림
“사회를 지탱하는 낮은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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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지탱하는 낮은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어요”

photo1 김중미 씨가 운영하는 ‘기차길 옆 작은 학교’에 찾아간 것은 지난 9월 23일.인천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만석동을 찾아가기 위해 기자는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서 겨우 공부방에 도착했다.처음 만난 김중미 씨는 기자가 생각했던 대로 꾸밈없고, 활발한 중년의 여성이었다.평소 대중매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가 김중미 씨.

photo1 김중미 씨가 운영하는 ‘기차길 옆 작은 학교’에 찾아간 것은 지난 9월 23일. 인천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만석동을 찾아가기 위해 기자는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서 겨우 공부방에 도착했다. 처음 만난 김중미 씨는 기자가 생각했던 대로 꾸밈없고, 활발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평소 대중매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가 김중미 씨. 인터뷰는 잘 안한다는 그였지만, 흔쾌히 수락해 준 『서울대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잔잔하지만 소신있게 한바탕 풀어냈다. “글로써 세상에 살풀이 한다”서울대저널(이하 저널): 글쓰기 외에도 인천 만석동에서 공부방 ‘기차길 옆 작은 학교’를 운영하고 계신데, 공부방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김중미: 공부방은 87년부터 시작해서 모인 사람이 꽤 돼요. 힘들어서 떠난 사람도 있지만, 한 두 사람씩 여기에 남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같이 하는 사람들이 10가구가 넘어요. 공부방 운영하는 자금은 후원을 받고 있어요. 여기서 일 하는 사람들을 세 종류로 나누면 부부 둘 다 직장에 다니고 저녁에 결합하는 사람들, 부부 중에 한 사람만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저희 부부처럼 둘 다 공동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활동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그래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씩 분담해요. 갖고 있는 것을 나누면서 살고 있어요.저널: 처음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있으신가요?김중미: 어렸을 때부터 책을 상당히 좋아했어요. 20대에는 문학을 통해서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졌지요.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처음이었어요. 아이엠에프(IMF)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더 힘들었죠. 그 당시에 저뿐만 아니라 이 동네 사람들 모두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경제가 살아난다고 하는 거예요. 매스컴과 다르게 계속 어려워지는 현실이 답답했어요. 그런 저에게 글을 쓰는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살풀이였어요. 세상에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으니까요.photo4가난도 가치 있는 삶의 일부저널: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방송에 나가면서 만석동도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김중미: 방송은 딱 한 번 탔어요. 그 이후에 방송사에서 만석동을 띄우려는 연락이 많이 왔죠. 그런데 저희들끼리 자체적으로 하지 않기로 했어요. ‘느낌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방지다는 말도 많이 들어야 했어요. 방송은 한 번으로 끝났지만 그 후에 독자들이 격려도 해주시고 이 동네 사진도 찍을 겸 많이들 찾아오시긴 했어요. 10월 되면 이 동네 분들이 부업으로 굴 까는 일을 하시는데 그런 모습이 이색적으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저희 역시 만석동에 십 몇 년 살면서 놓치기 아까운 풍경들이 많았지만 여기 사는 사람으로서 동네 분들께 죄송해서 사진 찍는 일은 삼갔죠. 그런데 여기 오신 분들은 동네 분들을 구경하듯이 찍어가니까, 동네 분들이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여기 못 찍어가게 하기도 했죠. 많은 분들이 아무리 이런 설명을 해도 잘 이해를 못 하시더라고요. 한 일 년 정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연락이 안 오네요.photo3동두천은 내 삶을 지탱하는 뿌리저널: 최근에 ‘거대한 뿌리’라는 소설을 낸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동안 계속 동화를 쓰시다가 소설을 쓰신 계기가 있나요?김중미: 소설을 쓰겠다는 동기를 가지고 쓴 건 아니예요. 언젠가는 동두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대상을 옮겨 갔을 뿐이에요. 내심으로는 청소년들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저널: 소설 ‘거대한 뿌리’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고 들었는데요?김중미: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동두천에서 15살 때 까지 살았어요. 그러다가 만석동으로 이사 왔어요. 그때 친구들이랑 헤어진다는 마음에 엄청 울었죠. 소설의 주인공인 ‘정원’이란 인물 속에 제가 7~80% 들어 있어요. 소설 속에서 나오는 ‘정원’의 독백이나 성장과정은 거의 제 이야기죠. 소설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은 제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편집해서 허구적으로 만든 거예요. 지난 99년도에 제 삶을 한번 돌아보려는 의미로 20년 만에 다시 동두천에 갔어요. 커가면서 동두천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된 후에는 쉽게 동두천에 살았다는 말을 못했거든요. 기억을 더듬으면서 동두천에 갔는데 제가 사는 만석동이랑 많이 닮았더라구요. 그 순간 제가 이렇게 살아온 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거구나 싶더라구요. 저널: 그동안 쓰셨던 소설이나 동화에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셨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기 쉬운데,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다루는 이유가 무엇인가요?김중미: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요. 특히 에프티에이(FTA) 문제는 양극화를 강화할거에요. 양극화 문제는 우리 경제 구조에서 발생되는 필연적인 일이죠. 미래에도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는 항상 숨겨진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해요. 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가 모른 척 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저는 잊고 싶지 않아요. 사회 어디에나 낮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요. 앞으로도 그런 믿음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가난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하고, 더불어 살게 하는 힘이 있어요. 사람들이 싫어해도 계속 써야죠.photo2“내가 만난 전태일은 예수와 닮아 있었다”저널: ‘오마이뉴스’에 쓰신 글을 보면, 젊은 시절에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일했던 경험이 인생에서 큰 영향을 끼치신 거 같아요.김중미: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사회가 어떤 지도 잘 모르고 사무직으로 병원에 들어 갔어요. 그때는 한 몇 년 돈벌고 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디든 패거리 문화가 있잖아요. 선배한테 잘못 보여서 6개월 만에 병원 원무과로 갔어요. 그 당시에 저녁 5시 30분에 출근해서 아침 8시까지 일했어요. 한 2년 정도 그렇게 일했죠.그 병원이 대림동에 있었는데, 원풍모방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에 오는 환자들이 대부분 빈민들이나 노동자들이었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손이 잘려서 오는 아이들, 기계에 눌려서 죽은 사람들, 수술 보증비가 없어서 수술도 못 받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다보니까 ‘한 3년 일하고 대학이나 가야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지요.그때, 원풍모방에서 한창 파업을 시작했어요. 노동자들이 자주 구타를 당해서 병원 응급실로 많이 찾아 왔죠. 그런데 언론에서는 이런 사실들이 한 줄도 실리지 않는거예요. 이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 때, 우연히 외국인 신부가 여성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걸 봤어요. 그 모습에 ‘천주교는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신부한테 가서 영세를 받았죠. 그렇게 사회운동을 시작했어요.저널: ‘오마이뉴스’에 전태일 관련 글을 쓰신걸 봤는데요. ‘전태일이 예수와 닮았다’라거나 ‘전태일이 내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라고 표현 하셨더라구요. ‘전태일’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김중미: 직장생활 할 때는 ‘전태일’을 몰랐고, 만석동에 와서 책을 선물 받고 알았어요. 처음에 만석동 왔을 때는 의욕을 가지고 왔지만 많이 힘들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환상도 깨져 가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떠날 수가 없었어요. 1년 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고, 제가 감상적인 면이 있어서 그러기도 했죠. 선배들은 전망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에 반박도 할 수 없었어요. 그냥 떠나면 안 될 거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죠.그 때 한 선배한테 ‘전태일 평전’을 선물 받았어요. 그걸 읽고 나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했죠. 내가 모르는 시기에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와 닿았어요.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 때문에 스스로 깨달아 간 모습들도 인상적이었죠. 지치고 힘들었을 때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저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 힘 중의 하나가 바로 ‘전태일’ 열사에요. photo5“여럿이 그리고 여유있게 살고 싶어요”저널: 작가로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꿈이 있다면?김중미: 제가 동두천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반골이셨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주류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항상 현실과 타협을 할 지, 아니면 편한 길을 가야 할 지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죠. 어떤 글을 쓸지는 작가로서 얘기할 수 없지만, 현실과 타협하지는 않을 거라고 얘기해 드리고 싶네요.저는 공동체 삶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조금은 부족한 삶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여유 있게 같이 살고 싶어요. 아이들이랑 웃고, 싸우고 뭉개지면서 그렇게 살고 싶죠. 사람들이 보면 비효율적이고 이상해 보일 지도 모르지만, 저는 여럿이 행복한 삶을 살고 싶거든요. 그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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