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그 선율 참 이상하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가 일본 동요라고?
우리 그냥 투자하게 해 주세요~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가 일본 동요라고?

photo32002년 한일 월드컵.우리나라의 16강전 상대는 이탈리아였다.붉은악마의 열광적 응원의 함성이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 가득 찼다.‘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이어 ‘오 필승 코리아’나 ‘아리랑’같은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압도적인 응원 덕분인지 이탈리아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얼마 후 붉은악마는 한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한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photo32002년 한일 월드컵. 우리나라의 16강전 상대는 이탈리아였다. 붉은악마의 열광적 응원의 함성이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 가득 찼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이어 ‘오 필승 코리아’나 ‘아리랑’같은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압도적인 응원 덕분인지 이탈리아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얼마 후 붉은악마는 한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한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작곡가인 주세페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한국 응원단이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상대국의 국보급 작곡가가 쓴 곡을 사용해 응원가를 만드는 모습 아닌가. 며칠 뒤 독일과의 4강전이 벌어졌던 상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번엔 ‘환희의 송가’, 혹은 ‘찬송가 13장’이라고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었다. 붉은악마의 그 같은 도발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도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아무래도 이 상황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애틀란타 경기장에 모여든 7만 명의 미국인들이 ‘밀양아리랑’이나 ‘쾌지나칭칭나네’에 영어가사를 입혀 응원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게다가 자기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느 나라 것인지도 모르고 부른다면 좀 웃기지 않겠는가. 아무리 음악에 국경이 없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웃기는 일이 한국에서는 자주 벌어진다. 양식은 친일 내용은 반일‘독도는 우리 땅’을 들은 일본음악가들은 그 음악과 가사의 괴리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너무도 민족주의적인 가사를 전달하는 선율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풍이라고 한다면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는 1910년대 일본의 음악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흔히 ‘뽕짝’이라고 하는 노래가 보급된 것은 이 시기라고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어른들은 그 음악이 익숙하고 친근하다고 여기지만 일본풍의 ‘뽕짝’이 이 땅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다. 사람들이 음악에 적응하는데 20~30년이 걸린 까닭이다.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며 자신들의 음악에 가사를 바꿔 보급했고 그런 음악들을 들으며 자라난 한국음악의 1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음악을 답습했다. photo1해방공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족문화의 재정립에 동의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었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어느 것이 일본 문화이고 어느 것이 우리 문화인지 누구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한일협정이 체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잔재 청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왜색가요로 분류되어 금지되었던 ‘동백아가씨’같은 ‘트롯’ 곡은 이후 일본음악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허용되었고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 큰 인기를 끌었던 이성애를 필두로 조용필, 주현미, 송대관 등을 거쳐 이박사까지 이어진다. 한국인의 음악 감성은 역사적 결과물이고 그 감성이 주입되는 과정은 급격하면서도 자못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래동요로 둔갑한 일본 동요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도 일제의 잔재는 여전하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와 창가, 일본의 전래 동요들이 무차별적으로 교과서에 파고 들었고 가사만 우리말로 고쳐진 그 노래들을 우리는 전래 동요라고 가르쳐 왔다. ‘퐁당퐁당’, ‘우리 집에 왜 왔니’,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똑똑똑 누구십니까’ 등 어릴 적부터 흔히 들어왔던 노래들이 일본에서 그대로 들여온 곡이다. 일본 동요를 부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이 노래들이 교과서에 버젓이 우리 전래 동요로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 문제다. 음악계의 노력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올라 있던 일본 동요는 대부분 탈락했다. 적어도 공교육 과정에서는 빠진 것이다. ‘학교종이 땡땡땡’처럼 ‘1학년’들의 필수 암기곡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제외 되었고 교과서의 절반 이상을 국악으로 채워 넣었다. 악기 역시 단소처럼 소리내는 데만 한 학기가 걸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꽹과리·북·장구와 같은 신명나는 타악기들을 위주로 가르친다. 90년대만 해도 학교의 음악선생님들은 음악교과서의 국악 부분을 대강 훑고 지나쳤다. 지금은 국악 교육이 강화돼 있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느냐에 상관없이 국악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 일제잔재의 청산과 함께 문화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교단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photo2우리의 올리브나무를 찾아서노동은(중앙대 국악이론) 교수는 이것을 “다양성을 찾아가는 교육”이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의 음악교육은 대부분 서양음악에 편중되어 있었고 그나마 가르친다는 전래동요는 엉뚱하게도 일본음악이었다. 노 교수는 “지금 어린이들은 이전 세대가 배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국악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음악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고 했다. 토머스 프리드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양성이라는 21세기의 문화 렉서스를 갖기 위해서 국악이라는 올리브 나무를 반드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융합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일제의 노력이 없었다 해도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면 일본음악은 우리 삶 속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음악 역시 일본인의 삶 가운데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왜색가요라 해서, 일본 동요라 해서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급격하고 폭력적으로 이식된 일본의 문화가 우리의 ‘문화 생태계’를 교란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우리 몸에 맞게 고쳐 입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제잔재 청산운동이 문화 정체성을 찾는 ‘문화운동’이 되어야 할 이유다. 이태리와의 축구경기에서 베르디를 노래하고 독일과의 경기에서 베토벤을 불렀듯이 머지않아 ‘퐁당퐁당’이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를 즐거운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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