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문화 향기가 피어나는 뜨거운 용광로

제목(배경) 이 거리는 문래동의 잿빛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다.‘영등포’라는 지명에서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쇠 냄새와 땀 냄새로 뒤섞인 철광소, 갓 상경한 어린 여직공들의 해사한 웃음, 걸걸함이 묻어나는 영등포 시장의 생명력 따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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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배경) 이 거리는 문래동의 잿빛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다.

‘영등포’라는 지명에서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쇠 냄새와 땀 냄새로 뒤섞인 철광소, 갓 상경한 어린 여직공들의 해사한 웃음, 걸걸함이 묻어나는 영등포 시장의 생명력 따위가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 ‘비 내리는 영등포’를 부른 구슬픈 목소리의 가수 이미자는 ‘다시 못 올 그 시절이 그리워라’로 노래를 끝맺으며 세월을 뛰어넘어 2008년의 우리에게도 촌스러운 영등포를 향한 아련함을 전해준다. 그러나 서민들의 소박함이 묻어나던 영등포는 도심 재개발 계획의 자랑스런 결과물로써 ‘뉴타운지구’라는 어색한 꼬리표를 단 채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한지 오래다. 그런데 그 변화 속에서 주목할 것은 몇 해 전부터 신생 아파트촌에 가려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철제단지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140여 명의 특별한 사람들이 영등포구 문래동에 색다른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땅값은 오르고, 예술은 점점 외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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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벽돌집과 문래동의 기억을 담고있는 쓸쓸한 골목길.

2004년 서울시가 홍대와 대학로를 문화특구로 지정한 이후 상업자본이 밀려들면서, 급상승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작가들이 저렴한 임대료에 교통이 편리한 문래동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3년 전 54-34번지 건물에 입주한 작가 네 팀이 애미집(aeMee zip)이라는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면서, 오고가던 많은 작가들이 문래동의 시공간적 매력에 빠지게 됐다. 같은 평수의 공간이라면 홍대의 3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임대료, 도심 속 아파트촌과 ‘철공소’라는 60,70년대 산업화의 유물이 공존한다는 아이러니함, 작가들과의 소박한 연대, 소음이 있는 작업이 가능한 문래동은 입소문을 타면서 급속도로 많은 작가들이 새 보금자리가 됐고 점차 자생적인 창작예술촌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2007년 ‘경계없는예술센터’의 거리공연 행사와 ‘2007 물레아트페스티발’이 개최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작가들은 문래동 예술인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2007년 12월 12일 ‘문래예술공단’이란 이름의 보다 발전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현재 이 커뮤니티에 속한 약 50개 스튜디오, 130명의 젊은 작가들은 연극·무용·마임·조각·실내국악·회화·일러스트레이션·사진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시의 ‘아트팩토리’사업, 정작 예술가들은 부정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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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산업화의 뒤안길로 물러나 조용한 철공소 모습.

지난 4월 서울시는 이 공간의 가치를 도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부가가치 문화시설로 평가했다. 2010년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의 일부로 도시 곳곳의 유휴 시설 및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공장·창고·폐교 등을 예술 창작공간으로 재생시키는 ‘아트팩토리(Art Factory)’ 사업을 발표했다. 이 사업은 장르별 창작 스튜디오, 창작 아케이드, 남산문화예술 창작 클러스터, 재개발 지역 내 레지던스형 창작스튜디오 등과 연계해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될 계획이다.근대 산업시대의 유산인 공장이 떠난 자리에 아트팩토리를 조성해 국내외 예술인의 창작과 교류를 돕고, 공장지역의 독특한 이미지에 예술성이 접목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문화명소를 만들어 지역재생의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추진의도 자체는 예술가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문화는 돈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돈이 되기 위해선 환경이 필요합니다’라는 ‘창의문화도시 마스터플랜’ PPT 자료에 있는 문구가 문화도시에 대한 서울시의 위험할 발상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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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블스럽진 않지만 예술가도 일종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해요’ 일러스트레이터 이소주 씨.

그는 이 사업이 ‘선진국 도시재생 흉내내기의 실패한 사례’로 남지 않으려면 문래동 아트팩토리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무한 경쟁력주의, 예술의 무책임한 도구화, 환경미화로서의 미학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철공소 지역공간 자체를 재생·보존하는 상상력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문화예술공단’ 커뮤니티지기를 맡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소주 씨는 영국의 유명 콜렉터에 의해 하루아침에 중국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는 쟝 샤오강의 예를 들며 아트팩토리 사업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아트팩토리 사업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 실시하는 게 꼭 반드시 나쁘다곤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보면 결국엔 상업적인 맥락에서 작가를 팔고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나머지 다수를 다 책임지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런 사업이랑 상관없이 묵묵히 되게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예술이 마치 격이 낮은, 저가인 것처럼 판단되는 게 문제인거죠.” 하지만 서울시 측에서는 이 씨의 이런 지적이 문래동 예술인들의 대표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최근 레지던스 입주를 위해 더 많은 작가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고 있다고 밝혔다.아트팩토리 사업 무색한 서울시 ‘지구단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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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에 세워진 가장 비싼 아파트와 등을 맞대고 있는 철제단지.

그런데 서울시 의회는 지난 5월, 준공업지역 안 공장부지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도시계획 조례 개정안을 발표했다. ‘창의문화도시’ 서울 만들기 비전이 한 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대표적 준공업지역인 문래동 철공소 지역도 이에 따라 아파트 개발 바람을 타고 있다. 역시 우려했던 것처럼 문화가 돈이 안 되면 환경 조성에 대한 투자는 중단되는 것이 당위적인 것일까. 서울시는 후속조치로 주택과 공장ㆍ상업시설이 혼재된 준공업지역에 아파트 건설을 허용하는 대신 아파트형 공장도 함께 건설해 개발이익을 일정 부분 환수하기로 했다. 또한 대규모 공장 이전부지도 산업기반을 일정 부분 유지한 채 복합개발을 허용할 것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그러나 본래 서울시 도시계획 조례에는 전체 면적 가운데 공장 비율이 30% 이상인 곳에는 공동주택을 지을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이를 감안하면 문래동 준공업지역이 받을 타격은 매우 심각하다. 또한 서울시는 추가개정 계획에서 시 의회와의 합의를 거쳐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영등포구 문래동 3·4가를 지역적 특성을 살려 유지토록 지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특히 이 지역 일대는 영등포구 부도심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돼 있따. 따라서 금년 4월 열람공고한 계획안에 따르면 문화 및 집회 시설 중 공연장·집회장·전시장을 권장 용도로 지정하고 있으며 토지이용계획상으로도 공동주택 단지화 될 수 없도록 돼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등포 구청 측에서는 문래동 철재단지가 들어서 있는 토지가 국유지가 아닌 사유지이기 때문에, 개발의 주체인 토지소유자가 사적으로 개발을 하겠다고 하면 특별한 제한이 없는 한 허가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서울시 도시계획국은 준공업지역 조례변경은 서울시가 아닌 서울시의회의 결정이었고, 문래동 준공업지역에 대한 개발계획은 영등포 구청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5월에 영등포 구청에서 지구단위계획을 대대적으로 변경하겠다고 한 이후 아직 보고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또한 아트팩토리 사업을 추진하는 서울시 문화정책과 황치호 주임은 “그 사업은 재개발지역 전체가 아닌 소규모의 지역을 상정한 것이고 그 지역만을 관에서 매입한 것이기 때문에 뉴타운과 관련된 지점에 대해서는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소규모 지역에서만큼은 예술가들의 보금자리가 보호되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아트팩토리 사업이 대학로나 인사동처럼 문화 ‘특구’로 ‘보호’하는 것이 아닌 ‘지원’수준일 뿐”이라고 말했다.상업지역화 논란에 대해서도 “홍대에 관이 개입하지 않아도 그곳이 저절로 상업지역화 된 것처럼 문래동은 그대로 놔두면 그 마저도 다 재개발돼서 아파트촌이 될 것이다. 그나마 아트팩토리 사업이라도 하는게 다행이다”라며 서울시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하지만 과연 서울시와 영등포구청 도심정책의 역할로써 ‘개발’의 논리를 배제한 채 순수한 목적만을 가지고 문래동을 창작촌으로 지정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자본주의를 이긴 최초의 ‘창작예술촌’을 꿈꾼다지난 7월 25일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오픈스튜디오’를 선보인 문래예술공단은 베이징의 따산쯔나 뉴욕의 소호, 구겐하임,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는 다른 문화적 도시재생을 지향한다. 예술가들은 놀이터처럼 작가들과 철공 노동자들, 지역민들이 어우러져 차도 마시고, 이벤트식으로 전시나 공연을 열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좋지만 상업자본이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문래동만의 크로스오버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이긴 예술의 형태나 문화적 사례는 아직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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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금상첨화였던 오리발 공연.

도심 속에서 낙후되고 쇠퇴한 산업이 점차 퇴출되면서 그 자리에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시개발의 측면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곳의 예술가들은 그것을 막아낼 수 있다면 문래동이 새로운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이 ‘예술’만의 힘이 아니라 예술이 공유되는 지역과 지역민, 그리고 그들에게 돌아가는 문화적인 향수와 정서적인 혜택들이 오고갔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오픈스튜디오를 계기로 각자의 파트에서 지원할 수 있는 예술 인프라들을 적극 활용하여 교육이나 벽화사업 등을 통해 주민들과의 연대를 지속하고 싶다는 바람이다.오픈스튜디오의 시각파트를 담당했던 이소주 씨는 자신들을 ‘좋은 일 하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주는 지역 주민들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벽화작업을 하다보면 철공소 아저씨들께서 ‘우리 가게에도 좀 해줘’, ‘나도 해봐야지’라며 저희 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봐주세요. 오픈스튜디오 행사 때도 아파트 부녀회장님께서도 주민들한테 일일이 홍보 도와주시는데 너무 감사했어요.”사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재개발이 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아파트에 앉아 엄청난 개발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인지, 아니면 삶 주변에서 살아있는 문화적인 향수를 체험할 것인지. 한 두 명의 작가가 떠서 문래동이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커뮤니티 전체의 이념이 스며들어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남을 것을 꿈꾸는 ‘문래예술공단’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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