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에 도시가 ‘확실히’ 예뻐졌다. 백화점 리모델링 공사의 포장막에는 ‘안전제일’이라는 삭막한 단어 대신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가 등장했고,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돼 행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예술은 미술관의 고상한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야흐로 공공미술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소외된 공간에 아름다움을 심는다, Art in City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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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in City 안산 원곡동 프로젝트, 주민들과 함께 그리는 타일 벽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지난 11월 17일, Art in City 2007 현장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안산 원곡동을 찾았다.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Art in City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시행되는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미술 사업’이다. 전체 주민 중 외국 이주민의 비율이 60%에 이르는 안산 원곡동은 국경없는 마을로 불린다. 공공미술로 주민간의 결속력을 높여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겠다는 것이 안산 원곡동 프로젝트의 취지다. 프로젝트를 감독한 공공디자인연구소 송주철 소장은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각종 기초질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라며 이주민들에 대한 행정적 통제보다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선 무질서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픽토그램(그림문자)을 설치했다. 언어가 다르니 그림으로 기초적인 규범의 이해를 돕고자 한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이 타향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적응할 수 있도록 공원에 아웅산 수지, 막사이사이 등 여러 동남아 국가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의 벽화도 그렸다. 벽화를 그린 화가 박주욱(40) 씨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다며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사람들은 자국 인물들이 벽화에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마을회관의 외벽에는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그린 타일들을 붙였다. 파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온 지 2년이 넘었다는 아메드 씨 역시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타일 벽화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파키스탄 전통문양이 그려진 2개의 ‘작품’을 남기고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시가 곧 작품이다,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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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중 하나인 정동 프로젝트 <멋진 신세계, 꽃이 피다>. 이화여고 담에 작가와 학생들이 함께 꽃을 그려 낭만적인 길을 연출하고자 했다. |
서울시에서도 올해부터 2010년까지 도시에 공공미술을 도입하는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동길, 옥수역, 불광천 등 도심 곳곳에 미술 작품을 설치해 도시를 하나의 미술관처럼 꾸미는 사업이다. 박삼철 도시갤러리 추진단장은 생산 패러다임의 지배에서 벗어나 삶을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문화정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빌바오도 원래는 산업도시였다며 “후기 산업도시 다음에 문화도시로 가는 게 필연적인 절차”라고 강조했다.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서울의 얼굴’로 볼 수 있는 공공영역들의 의미를 미술적으로 재고해보는 것이다. 인사동에 7m 높이의 전통 붓 조형물을 세우는 ‘일획을 긋다’ 프로젝트가 바로 이러한 사업의 일환이다. 또 하나는 ‘커뮤니티 아트’로 불리는 사업으로 미술작업을 통해 지역공동체에 주체적인 공공의식을 고취하는 목적을 가진다. 작가의 창작욕보다는 시민들의 일상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신림동 우리자리 공부방에서는 ‘놀이방+공부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텃밭과 툇마루를 조성해 생태탐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리기도 한다. 박삼철 단장은 “일련의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시민이 작가이자 큐레이터까지 되는 지향점만은 분명하다”며 “내년에는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간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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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 중심의 공공미술 사업과는 별도로 시민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프로젝트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간판문화연구소’의 ‘대한민국 좋은간판상’. 최근 도시에 간판이 난립하며 경관을 파괴한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2007년 1월 간판문화연구소가 설립됐다. 간판문화연구소는 간판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보고, 규제와 단속보다는 시민들 스스로의 의식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름도 ‘간판연구소’가 아닌 ‘간판문화연구소’로 지었다. ‘대한민국 좋은간판상’은 시민이 직접 우리 주위의 좋은 간판을 선정하는 캠페인이다. 홈페이지에서 일반 시민들에 의해 상위 추천작이 선정되면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된 ‘간판별동대’가 그 간판주를 직접 만나 리포트를 작성한다. 그리고 심사회를 열어 이달의 간판상을 뽑는다. 서울시에서도 거리 미관을 위해 2003년 11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청계천 주변 3600여개 업소의 간판을 새 모델로 교체한 바 있다. 그러나 간판들이 천편일률적이고 개성이 없어 결국 업소 주인들이 자비를 들여 새로 바꿨다. 간판문화연구소는 좋은 간판의 기준으로 특정한 색, 혹은 특정한 폰트를 사용할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각자 나름의 개성을 지니면서 매장의 특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간판이 주로 좋은간판상으로 선정된다. 송정아 연구원은 좋은간판상을 제정하는 것 자체가 좋은 간판이 무엇인지에 관해 협의해 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송 연구원은 “문화를 바꾸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규제하고 단속하면 바뀌는 모습이 확실히 눈에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시민들 스스로의 칭찬을 통해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개선해 보려고 한다”고 말하며 시민들의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문화는 트렌드가 아니다”, 근본적 인식 변화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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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미술연구소 송주철 소장. 국경없는 마을의 다문화적 특색을 살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다양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행정기관과의 갈등이다. 공공미술연구소 송주철 소장은 “공원에 거대한 장기판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시의 반대로 무산됐다”며 사업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흔히 행정기관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관리의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의견 조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갈등의 근본적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송주철 소장은 민주화의 징표라는 점에서 공공미술의 도입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공공미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시작됐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박삼철 도시갤러리 추진단장 역시 관점의 문제를 지적했다. “삼청동에 모빌의 창시자로 유명한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이 들어왔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갤러리 홍보를 위한 ‘쇼업’ 작품일 뿐이다. 공공장소에 놓인다고 모두가 공공미술은 아니다. 공공의 삶을 향유하기 위한 고민에서 나오는 결과물이어야 한다.” 박 단장은 기본적으로 삶터로서의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생산적인 해법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도시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냉소적인 비판주의자나 허황된 개발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땅에 공공미술이 뿌리내리기 위하여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공공미술이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현행 문화예술진흥법 11조에는 연면적 1만㎡이상의 건물에 건축비 0.7%의 미술작품을 설치해야 증축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들중 상당수가 시각공해를 일으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환경조형물이 건축물의 준공검사를 위한 요식행위로 취급되다보니 건축주가 저가에 조형물을 제작하고도 고가로 등록하는 등의 거짓계약까지 성행하고 있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5년 11월 민병두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이 발의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 법률안’은 공공기금을 만들어 건축주는 건물 시공가의 일정 부분을 공공미술을 위해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타 정치적 이슈에 밀려 국회에서 2년째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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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는 삶의 양식”이라고 재차 강조했던 박삼철 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장. |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다. “미술관은 왜 ‘폼잡고’ 가야 하나. 자신이 문화적이라는 것을 억지로 증빙하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늘 주눅 들어 있다. 생활이 예술이라면 좀 더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박삼철 단장은 삶에 친숙하게 다가가는 공공미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동시에 박 단장은 공공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논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작가도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는 점에서 미술계 내부의 자생적인 프로젝트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송주철 소장은 “지금은 문화관광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주관하는 사업들이 많은데 앞으로는 지역에 살고 있는 미술가 스스로가 일상에 관심을 갖고 예술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도시가 미술관이 되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예술이 된다. 그러나 소통과 참여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 창작과 향유가 함께 가지 않으면 공공미술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