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이반동아리 ‘QIS’(큐이즈)가 매년 주최하는 이반영화제가 올해로 10회째를 맞았다. 지난달 10일부터 사흘간 QIS 주최로 열린 제10회 이반영화제 ‘Be the Lez’는 레즈비언에 관한 작품 몇 편을 상영했다. 영화제 마지막 날에는 동아리 10주년 행사도 함께 성대하게 치렀다. 영화제도 동아리도 벌써 햇수로 십년을 맞이했지만 아직 많은 관악 학우들에겐 QIS의 발음도, 학내 이반영화제의 존재도 낯선 것이 사실이다. 마치 열명 중 한명 꼴이라는 수치 속의 동성애자가 옆자리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이 생경한 것처럼. QIS의 동아리방 문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정식 명패 대신 자물쇠가 하나 걸려 있다. 우리와의 만남을 싫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니 “네! 들어오세요.”하는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인터뷰를 위해 무려 다섯 분의 동아리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머리를 하고 후끈한 찜질방에 기대앉은 기분으로, 유쾌하고 진솔한 수다를 시작했다. QIS는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고 밝고 현실적인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반영화제를 열어왔다. 올해 영화제의 주제와 작품 선정 과정에 대해서 QIS의 대표 A씨는 “작품 선정에 엄청난 기준이 있죠.(웃음) 특히 레즈 영화들은 너무 암울해서 끝에 가면 꼭 주인공이 자살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잖아요.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영화를 고르려고 노력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영화제 준비과정은 녹록치가 않다.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홍보가 가장 힘들다. “외부단체에 일일이 연락해서 모셔오는 것도 힘들고. 특히 다른 동아리들은 자랑스레 pc(플랭카드)를 걸지만 저희는 밤 열두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무슨 뱀파이어도 아니고. 모자 쓰고 얼굴 가리고 하죠.” 영화제 초기에는 필름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동성애에 대한 인식도 워낙 부족했던 터라 관객들은 영화제를 통해 낯선 문화를 좀 더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고 영화제의 존재 자체가 저항이자 운동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올해 영화제는 학우들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았어요. 이제 영화제를 하는 것만으로는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영화제 마지막 날 동아리 10주년 기념행사가 흥겹게 치러졌다. “정말 재미있게 했어요. 세상을 뒤집어 놓을 뻔 했으니. 연대 ‘컴투게더’ 고대 ‘사람과 사람’ 등 외부에서도 많이 오시고. 행사 자체는 춤, 노래가 어우러졌고 10년간의 동아리 성장과정, 10년 후의 예상모습을 담은 슬라이드쇼도 있었죠. 게임도 하구요.” 물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심지어는 온라인에 있다보면 온 세상 사람이 동성애자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단다. 하지만 이런 만남과 별개로 각 대학 동아리들이 하는 행사에 직접 참여하고 힘든 점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큰 연대를 벌이는 힘을 얻는다고 한다. 이런 힘을 모아 QIS는 매년 봄에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방학 때마다 열리는 인권캠프, 청소년 동성애자 인권학교 등의 행사에 주최단체로 들어가기도 하고 참여자로서 즐기기도 한다. 1995년 ‘마음001’로 출발한 QIS. 동아리 창립 당시에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는 삐삐 시대였죠. 지금처럼 연락하고 사람 모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대요.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아웃팅의 위험을 감수하고 일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야했죠. 그래서 한 여자 선배는 등 뒤에 누가 “레즈년, 니가 남자맛을 못 봐서 그렇지”라고 붙여 놓아서 누가 떼어 주기 전까지 그대로 다녔다더라고요. 전동대회에서 가등록을 하려고 할 때는 기독교 동아리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기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의 현실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다. “사실 해 보고 싶은 것은 많아요. 축제 때 마차를 타고 꽃을 뿌려볼까도 생각해보고. 우리는 그 흔한 장터나 일일호프 한 번 못해봤거든요. 아웃팅이 무서워서 그래요. 동아리에서 무슨 행사를 하면 다들 희생하면서 하는 거예요. 절대 강제하지 못해요.” 얼마 전에 영화제를 알리는 pc가 찢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리방을 들어오는 것도 겁나는 일이다. ‘퀴어 애즈 포크’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얻고 여대생들 사이에서는 게이 남자친구를 하나쯤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는 웃지 못 할 소리마저 들리는 요즘이지만 실제로 느끼는 위협의 수위는 “호모 새끼, 찢어 죽여!”라고 적힌 쪽지가 동방 앞에 붙어 있던 그 시절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QIS는 학내 성적 소수자들의 휴식처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 “학내 성적소수자를 위한 쉼터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제일 고맙다고 생각해요. 여성주의 같은 경우는 꽤나 담론화가 되어서 강의실에서, 어디에서 그들에 대한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그렇지만 동성애자들도 그런 불편들을 겪고 있단 말예요 사실은. 어떤 사람들이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규격화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이성애 중심으로 규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없는 존재나 다름이 없어요. 마치 왼손잡이용 가위가 잘 안나오는 것처럼. 학내에서 세미나를 해도 “동성애자들은 그렇다면서?”라고 한다거나. 그럼 마치 저는 “아프리카에 사는 그 부족은 그렇다면서?”라는 얘기를 듣는 기분이죠. 내가 바로 그 부족인데.” 동성애자간 결혼을 합법화한 네덜란드와 우리 사회의 동성애 인권수치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덜란드 사회의 관용을 높이 사고 우리의 천박한 인권수준을 개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QIS 사람들의 생각은 뜻밖이었다. 서구 사회는 동성애자의 존재가 많이 알려져 있어 그만큼 호모 포비아에 의한 테러의 위협도 크단다. 한국사회에서는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 비극이긴 하지만 아예 존재 자체가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테러의 위협은 적다. 살해의 위험이 덜 한 것이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하는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지.” 동아리원 L씨는 이렇게 말하며 그냥 웃어버린다. 동성애자도 결혼할 수 있는 사회는 진정 동성애자의 천국일까? “사실은 복잡한 담론이긴 한데. 결혼이란 것 자체가 이성애적 담론일 수 있는데 동성애자 결혼을 인정한다고 하면 왠지 보너스로 하나 준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마이너리티를 그 자체로 존속하도록 하는 거죠. 결혼이란 이성애자의 제도 안으로 가두는 듯 해요. 우리에겐 잃어버린 서른 살이 있어요. 그 때 되면 뭐해야 될지 모르잖아. 지금은 젊으니까 사람도 만나고 그러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린 미래가 없는 거 아니에요. 이성애자들에겐 탐탁하진 않을지라도 해답이 있는 반면에 우리에겐 아무런 해답이 없어요. 모델이 없어요.” 우문현답(愚問賢答)은 수다 막판까지 계속되고 말았다. 그래도 서구 사회의 경우는 적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의 경우 그것조차 부재한 것 아니냐는, 한국 동성애자 운동의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동아리원들 저마다의 깊숙한 고민이 담긴 의견들이 쏟아져 나온다. “저희한테 하실 질문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면 저희가 한 방향을 제시하면 기사로 인해 그게 마치 서울대 학생들에게는 이게 동성애 인권운동의 방향이라고 오인될 수 있잖아요.” “사실 저희들 생각도 다 달라요. 게다가 외부에 얼마나 동성애자들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안 잡혀요. 저희가 작은 동아리는 아니지만 그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워요. 계몽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마치 장애인에게 골방에만 있지 말고 운동을 할 것이냐 아님 생계를 이어가는 구슬 꿰기를 할 것이냐를 묻는 것처럼.” “환상이랄까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동성애 관련 기사들의 논조가 좀 그렇거든요. ”동성애자가 그렇게 닫혀있으니까 너희가 계속 그렇게 사는 거야“ 라는 어조요.” “반대로 저희가 이성애자들은 왜 하나로 뭉치지 않느냐고, 이성애자들의 통합된 운동의 방향성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겠죠? 저희도 똑같아요. 동성애자라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죠.” QIS는 작년에 새로 정한 동아리 이름이다. ‘Queer In SNU’의 약자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드러내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생활공간이 되고자 하는 취지였다.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지는 않는, 일곱 가지 무지개 빛이 모두 나름의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의 시선으로 이반을 재단하고 타자화, 정형화하는 폭력이 거두어지고 QIS 동아리방의 자물쇠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일곱 색깔이 모두 영롱하게 빛나는 무지개는 지금 여기서 얼마나 먼 곳에서 떠오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