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에서 성폭력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자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합의되지 않은 여러 가지 개념들이 혼재하면서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서로의 합의에 바탕을 둔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성폭력 사건의 원만한 해결 및 재발 방지라는 목적을 이루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학내 성폭력 사건에서 쟁점을 이루어 온 개념들은 무엇인가? 어떠한 지점들이 쟁점의 대상이 되었는가? 성폭력? 광의의 성폭력 개념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총칭’한다. 학칙에서는 ‘성희롱이라 함은 성범죄행위의 구성 여부와 관계없이 성적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로서, 그 기준은 피해자의 합리적인 주관적 판단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록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넓은 의미로서의 성폭력을 정의하고 있다. 특히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 성폭력 개념은 넓게 인정되는 편이어서 ‘성희롱’이나 ‘환경적 성폭력’의 경우도 성폭력이라는 데는 다들 공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이 성폭력인가’라는 큰 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다. 사회적, 법적 관점을 살펴보면,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및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에서도 성폭력과 성희롱으로 나누어 규정하는 등 학칙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폭력에는 강간, 추행 등 형법상의 범죄가 포함되며, 성희롱에는 성적 모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학내에 비해서 성폭력의 인정 범위가 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규정에서나 피해자의 경험 바탕으로 성폭력의 인정 여부가 결정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피해자 중심주의?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성폭력 인정 여부’와 ‘성폭력 사건 조사 과정’에 있어서이다. 성폭력 인정 여부를 결정할 때, 피해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성폭력의 성격상 어쩔 수 없다. 피해자가 성적으로 불쾌감을 느끼거나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은 경우, 가해자의 고의 여부와 관계 없이, 피해자의 경험만으로도 성폭력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다만, 경험이라는 주관적 상황을 최대한 객관화하기 위해, 학칙에서의 단서처럼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조금은 애매한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명백한 과대 망상이나 성폭력적 상황이 아닌 때를 성폭력적 상황이라고 혼동하는 경우는 ‘합리적인 판단’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건 정황을 살필 때에 있어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에 대한 믿음을 두는 것이다. 사회 관념상,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게 된다. 특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피해를 입고도 이를 공개하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피해 사실이 알려질수록 피해자의 수치심만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일부러 피해 사실을 확대시키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령 가해자에 대한 복수심리 등이 존재해서 사실을 부풀리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체로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의 특성 상 사건 조사 과정은 쉽지 않게 된다. 이 때, 피해자의 진술에 추정력을 부여하는 것이 정의의 관념상 합당할 것이다. 사실상 종속적인 권력 관계를 부정한 채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데 역행하게 된다. 즉, 피해자 중심주의는 원칙적으로 옳다. 다만 합리적인 조사 과정을 갖추고, 가해자(피신고자)에게 충분한 항변 기회를 줌으로써 혹 피해자 중심주의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학내 성폭력 처리 과정? 현재 학내에서 성폭력 신고를 접수하고 그 해결을 도모하는 곳은 ‘성폭력 상담소’와 관악여성모임연대(관악여모), 각 단위 여성 모임이 있다. 상담소가 생기기 전에 학내 성폭력 사안을 다루었던 곳이 관악여모 및 단위 여성 모임이다. 여기에서는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비상대책 위원회(비대위)를 꾸려서 자치규약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의 해결을 모색한다. 비대위에는 여성 모임, 가해자·피해자 대리인, 공동체 구성원 등이 참가하여, 피해 사실을 확인한 뒤, 공개 사과나 재교육 등의 문제에 서로 합의하게 된다. 자치 규약에 대한 구성원간의 분명한 합의가 없는 경우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에 비해 지난 해 개소한 ‘성폭력 상담소’에서는 학칙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공식적이고 강제력 있는 징계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비대위와 다른 점이다. 성폭력 사건이 접수되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 절차를 거친 뒤, 가해자에 대한 징계 여부 및 범위를 파악하게 된다. 이 때 피해자는 중재를 선택하여 당사자간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 만약, 중재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교수회의 등을 거쳐 학칙에 의해 징계를 받게 된다. 이러한 해결 방식은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근자가 없는 등 인력이 부족해서 사건 예방은커녕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기에도 힘든 상황이다. 또한 강제 조사권이 없으며, 불투명한 재심 요구 수용 과정도 문제가 되고 있다. 한편, 학내 성폭력 처리과정과 관계없이, 현행법상 처벌이 가능하다면 형사 고소도 가능하지만, 이 때에는 기존의 학내 처리 절차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 실명 공개 사과?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후, 비대위에 의해 처리될 때, 비대위에서 사건 처리를 종결하면서 가해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가해자의 실명 공개 사과이다. 그리고 사건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논란이 되는 사안 중의 하나다. 가해자 실명 공개에 대한 거부감은 이번 여름 농활 성폭력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가해자 실명 공개 사과의 의의는 ‘가해자의 책임있는 사과를 통해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동체 내에서 사건을 공론화하여 성폭력 사건의 재발을 막고 건전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법적 해결을 내세우기 이전에 자치 공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책임 있는 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내의 해결은 이상적이며 가치 있다. 가해자가 변화할 것이라 믿고, 그가 변모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책임있는 해결 자세임이 분명하다. 다만 우리 공동체에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를 보면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는 무척 요원해 보인다. 전제에서처럼 이상적인 자치 단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의 ‘폭로형’ 자보는 공론화라고 해 봐야 고작 ‘저런 짓(?)을 하면 성폭력이구나’라는 경각심만을 심어줄 뿐이다. 이런 경우 가해자의 이름이 A가 아니라 굳이 내가 아는 아무개로 공개된다고 해서 사건이 공동체의 문제로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징계권이 없는 비대위 입장에서는 공개 사과를 합의에 의해서 가해자가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의 입장에서는 실명 공개가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징계로서 다가오지만, 가해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억울함이나 부당함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알려서 ‘매장’시킨 것 때문이라는 반감을 살 우려가 있다. 학내 여성주의 진영에서 실명 공개 사과에 대해 바람직한 처리 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일부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무조건 ‘가해자 편들기다’, ‘성폭력 사건 처리의 논점을 흐린다’는 식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그들이 우려하는 바에 대해 함께 고민하려는 아량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개 실명 사과의 의의는 분명 놓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고려하여 구성원간의 공감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로서 정확히 감싸안아야 할 것이다. 사건 처리에 있어서 논점이 되는 개념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을 무시한 채 여성주의와 반여성주의의 대립구도로 몰고 나간다면, 학내 성폭력 문제의 자치적 해결은 요원해질 것이다.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되는 일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학내에서 보다 건설적이고 진취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